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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의 축조시기는? by Warfare Archaeology

현재 평양에 소재하는 안학궁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크게 3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고구려 전기의 평양성, 그리고 고구려 말기의 별궁, 마지막으로 고려시대의 별도 등이 그것인데, 사실 저는 안학궁에 대한 연대 논란이 있다는 것을 대학교 3학년, 그러니깐 군대 다녀와서 복학한 뒤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니깐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지났을 때죠. 모 학회에서 주관하던 학술대회에 갔을때 일본인 학자(이름은 기억 안 납니다)가 그렇게 주장을 하자(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그 학자는 그때 새로운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있었던 주장을 정리해 발표했던 것 같습니다) 토론자로 참석했던 몇몇 국내 학자들이 심하게(?) 반발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 또한 안학궁은 당연히 고구려 후기 도성으로 알고 있었던 터라 이런 <논란>이 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죠. 

그 이후 몇몇 논문들을 살펴보고, 주변에 이와 관련된 논문을 쓴 이들도 있었기에 관심을 갖고 살펴본 결과, '어? 이거 생각 외로 심각하게 살펴봐야겠네?'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런데 이와 관련해 최근에 <고구려 기와>를 중심으로 안학궁 축조시기를 살펴본 논문이 있기에 여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특히 왕궁과 같이 기와가 다량으로 쓰이는 건물의 경우, 기와를 통한 편년은 매우 유의미하기 때문에, 고고학에 큰 관심이 없는 분들도 한번쯤은 둘러보시면 좋을듯 합니다. 

논자는 먼저 그동안 고구려 기와로 알려진 것들을 싹 정리해서 분류를 합니다. 그렇게 분류된 고구려 기와는 총 3,200여점이고, 이를 몇몇 기준에 따라 선별합니다. 먼저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기와, 명문 검토를 통해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는 기와, 고구려 기와와 기술적 속성이 일치하는 집안 및 평양지역(수도권) 출토의 기와 등으로 세분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논자는 4장에서 고구려 기와의 특징을 일괄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기와의 문양과 제작기법(특히 접합기법)이 주된 분류기준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수막새 접합기법>의 경우, 기존에 명문과 문양의 변화만을 편년의 판단근거로 삼은 것에 더해 하나의 기준을 더 제시한 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5장에서 안학궁의 고구려 기와에 대해 정리합니다. 먼저 기존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전기 평양설의 근거 : 가장 기술적으로 발달한 <청회색>의 기와가 왕릉으로 추정되는 초대형 적석총 및 도성유적에서만 사용된다. 즉, 청화색 기와가 출토되는 안학궁은 고구려의 전기 평양성이며, 태왕릉이나 장군총 조영 당시의 기와와 동시기로 판단된다.

2. 고구려 말기 별궁의 근거 : 집안지역 적석총에서 출토되는 복선연화문 수막새와 동형의 수막새가 안학궁에서 발견되지 않고, 안학궁에서 출토된 수막새 및 암막색와 같이 주연부에 연주문양이 표현된 것이 한반도에서 유행하는 시기가 통일신라시대 이후이다.

3. 고려시대 별도의 근거 : 문양부가 있는 암막새가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제작된다. 한편, 傳 만월대 출토 암막새가 안학궁 출토품과 문양 구성이 유사한데, 대동강 북쪽의 안학궁이 통일신라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해당 지역의 와당은 통일신라시대까지 올려볼 수도 없고, 고려시대로 봐야 적절하다(부여 금강사지 출토 암막새와 비교해 이를 고려로 봤다고 하는데, 정작 금강사지 출토품에 대한 정밀한 검토는 생략됐으니 이 부분은 넘어가자).

이에 논자는 안학궁에서 출토된 기와와 고구려 기와의 일반적인 특징만 살펴보도록 하겠다고 합니다(고려시대 기와와의 비교가 이뤄지면 보다 정확한 안학궁 축조시기가 밝혀질텐데, 그건 추후 논고로 하겠다고도 하고요). 앞서 언급했듯이 논자가 중점적으로 살펴본 부분은 안학궁 출토 수막새의 문양적 특징과 제작기법상의 특징 2가지입니다. 

1. 문양

안학궁에서 출토된 수막새는 시문된 문양에 의해 주문인 연화문과 변간에 연꽃 변형문이 확인되는 <복합연화문 수막새>, 주문인 연화문양만 와당면에 배치된 <연화문 수막새> 이 2종류로 대별할 수 있다. 그렇게 봤을때 복합연화문 수막새들을 살펴보면 일반적인 고구려 복합연화문 수막새와는 다르다고 명시하고 있다. 단, 연화문 수막새의 경우는 고구려의 것과 유사한 것도 있지만, 역시 다른 것도 있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2. 제작기법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수막새는 주로 3가지의 긁기에 의한 제작법에 의해 만들어진다. 논문의 중반에 언급되는데,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수키와를 와당부의 뒷면에 접합하기 위해 단위를 가지지 않는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긁어내는 기법 1(복선연화문, 복합연화문에서 확인), 와당부에 수키와를 접합하기 위해 뒷면을 일정한 폭을 가지는 도구를 이용해서 긁어내는 기법 2(복선연화문에서 확인), 와당부에 수키와를 접합하기 위해 단위를 가지는 빗상의 도구, 즉 다치구를 이용해 뒷면을 긁어내는 기법 3(권운문 수막새를 제외한 모든 수막새에서 확인) 이렇게 3가지 기법이 확인된다고 한다. 하지만 안학궁에서 확인된 수막새는 모두 와당부 뒷면에 동심원상의 병행하는 두 줄의 홈이 있는 것이 특징으로 이는 분명히 고구려의 일반적인 수막새와는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 더불어, 앞서 문양만 놓고 봤을때 고구려 것과 비슷하다고 분류했던 것조차도 제작기법만 놓고 보면 분명히 고구려 것이 아니게 된다고 한다.

물론 논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안학궁에서 출토된 기와의 편년을 얘기한 것이므로 이것이 안학궁 축조시기와 100% 직결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기와는 처음 얹은 뒤 지속적으로 개보축을 하면서 수리해서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게 정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안학궁에서 출토된 다수의 수막새의 제작시기가 고구려 멸망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다른 분들도 한번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

해당 논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홍규, 2014,「고구려 기와의 분류와 특징에 관한 일고찰」『선사와 고대』41, 한국고대학회.

(파일 용량이 크다고 업로드가 안 되네요. 이런건 다음이나 네이버보다 확실히 이글루스가 불편한듯 합니다. T.T)


고고학과 통계학 by Warfare Archaeology

고고학에서 통계학은 상당히 중요한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그와 관련한 개설서(클릭)도 있는만큼 전통고고학이 주류인 한국 고고학계 내에서도 통계학은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다. 주인장의 지도교수님도 석사 수업에서 항상 통계학 수업을 1번씩은 하시는데, 당장 그와 관련된 논문을 작성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방법을 알아두면 유용하게 쓰이는게 분명하긴 하다.

이는 주로 유학파 출신의 서울대 선생님들에 의해 많이 소개되었는데, 위에 링크로 소개한 책의 번역가인 김범철 선생님(충남대 교수)이라든가 고고학 관련한 학제간융합연구사업을 담당(클릭)하는 김장석 선생님(서울대 교수)이 대표적인 연구자라고 얘기할 수 있을듯 하다(두분 다 청동기시대 연구, 일부 초기철기시대까지 연구 범위 확장). 특히 청동기시대 토기 및 취락 연구에 많이 활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역사시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아마 문헌이라는 보조수단의 有無가 선사시대 연구자로 하여금 다른 보조수단을 찾게끔 하는 것 같다). 기존에 고고학에서 차용한 자연과학 혹은 사회과학쪽 연구 방법론이라고 하면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 같은 것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밖에 각종 자연과학분석법이 도입되었는데, 이와 함께 도입된 중요한 연구방법론 중 하나가 통계학이 아닐까 싶다. 특히 토기 연구에서 통계학은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토기>라는 녀석이 특정 장인집단, 특정 장인의 습관이 스며든 인공적인 조형물이라고 했을때 파편 형태로 확인된 토기를 통계학적으로 분석 가능하다면, 일부분만 갖고도 전체의 내용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서평으로 소개했던『토기연구법』이라는 책의 말미에 관련 내용이 자세히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하지만 통계학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닌데, 그건 바로 관련 자료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해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해서 적절한 자료가 있길래 급하게 소개하는 바이다.

디씨에 올라온 글인데(클릭), 2차 대전 중 미 해군에서 항공기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장갑을 추가할 부위를 정하려는 목적에서 작전 중 피격된 항공기의 피탄 분포를 조사했고, 그 결과 피탄이 많이 된 부분을 확인했다고 한다(기체의 전체를 다 두껍게 강화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기체가 무거워지게 되고 결국 기동력이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에 필요한 양의 장갑을 효율적으로 덧대야만 했다). 하지만 연구 책임자인 오스트리아 출신 통계학자 아브라함 발드는 피탄이 집중된 부위가 아니라 피탄이 거의 없는 부위에 장갑을 추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여기까지 보면 상식적으로 좀 의아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피탄이 많이 된 부분이 당연히 공격을 많이 받았을테고, 그쪽에 장갑을 덧대는게 상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브라함 발드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했다고 한다.

우리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기체들은 비판되고도 살아남아 귀환한 기체임. 그말은 그 부분은 피탄이 집중되고도 기체가 생환할 수 있다는 소리임. 그러므로 피탄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을 오히려 강화해야만 함.

결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아마 피탄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에 장갑을 덧댄 뒤에 생환한 기체를 살펴봤을때, 그 부분에 드디어 피탄 흔적이 확인되기 시작했다면, 아브라함 발드의 주장은 사실로 증명이 됐을 것이다. 이 사례는 통계학에서 편향된 모집단을 토대로 확률을 계산하는 방법론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즉, 통계 수치를 계산된 <양적 수치>만 갖고 비교하면 안 된다는 소리다. 즉, 집계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수치가 있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끄집어내서 원하는 결론을 도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관련 내용은『틀리지 않는 법』이라는 책에도 소개되었다니 참고하면 좋을듯 하다(아직 본인도 그 책은 안 읽어봤다). 그밖에 아브라함 발드의 연구법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다면『치명적 실수를 위대한 성공으로 바꾸는 블랙박스 시크릿』이라는 책도 참고하면 좋을듯 싶다(이 역시 본인은 아직 안 봤으니 책 내용에 대한 평가는 추후로 미루고자 한다).

통계학에 대해 지도교수님은 <자료를 어떻게 조작하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조작>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造作으로 썼을때 '어떤 일을 사실인 듯이 꾸며 만듦 / 진짜를 본떠서 가짜를 만듦 / 지어서 만듦'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操作이라는 의미로 썼을때는 '기계 따위를 일정한 방식에 따라 다루어 움직임 / 작업 따위를 잘 처리하여 행함'이라는 의미가 있다. 지도교수님께 한문으로 어떤 의미인지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영어 의미를 살펴봤을때, 'operate' 혹은 'control', 'handle'의 의미도 있지만, 'manufacture' 혹은 'invent'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두 단어의 의미를 다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듯 싶다. 위의 사례에서 살펴봤듯이 어떤 방법으로 수집된 계측치를 어떻게 다루느냐?(조작)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나온다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듯 싶다. 눈에 보이는 계측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사실도 공존하고 있음을 인지하면 될듯 싶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주인장이 논문 작성시 유적에서 출토된 무구류의 수치를 입력하고, 이를 백분율로 구분한 뒤 유물의 출토 위치 혹은 출토 맥락을 수치화했다고 하자. 이를 통해 당시 그 유적에서 전투 행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살펴본다고 가정했을때 어떤 문제가 생길까? <썩어서 없어져버리는 재질의 무구류의 존재>에 대한 계측은 불가능하다는 변수를 간과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즉, 석기 혹은 금속기로 만들어진 무구류만 갖고 살펴보면 그 결과 자체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통계학을 적용할때 그게 합리적인 적용방법인지 자체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는 소리가 된다.

그럼 하나만 더 얘기해보자. 특정 유적에서 나온 토기 수백점의 높이와 구경, 저경 등의 수치를 입력해서 이를 교차분석한 결과가 나왔다고 하자. 그 결과 모든 토기는 높이 10~30㎝ 내외, 구경은 5~15㎝ 내외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하자. 그럼 여기에서 연구자가 정해야 할 것들이 있다. 이 토기를 높이를 기준으로 몇개의 집단으로 분류할지? 아니면 구경을 기준으로 분류할지? 그것도 아니면 토기의 용량을 기준으로 분류할지? 이 모든 것들이 상관성이 있는지? 등을 따져봐야 할 것이며, 집단으로 구분할때 히스토그램을 기준으로 2개의 집단으로 나눌지, 아니면 3개의 집단으로 나눌지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2개로 나눌지, 3개로 나눌지, 어떤 기준으로 나눌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이며, 본인의 주장에 가장 부합되는 식으로 <조작>되어야만 한다. 같은 데이터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주장하는 바가 다를수록 당연히 그 결과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소리이다. 즉, 통계학을 적용한 뒤에 어떤 기준으로 자료를 조작해 나의 주장에 가장 적합한 결과를 얻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소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통계학은 수학이면서도,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며, 그 결과가 사실이언정 진실이라고 얘기하기는 곤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을 연구하는 중요한 연구방법론이라는 점은 분명하며, 직관에 주로 의존하는 유물의 형식분류보다 객관적이려고 노력한 방법이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어떻게 보면 양날의 검과 같은 존재인 셈인데, 암튼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고고학이라는 것이 그냥 무식한(땅 파고 땀 내고 노가다에 술 퍼먹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학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언급하고 싶어서이다. ^^


『사기』「조선열전」관련 최고의 논문 by Warfare Archaeology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김병준 선생님의「漢이 구성한 고조선 멸망 과정-『사기』조선열전의 재검토」라는 논문이다. 개인적으로도 고조선 관련해서 반드시 읽어봐야만 하는 텍스트로 생각하고 있고, 처음 이 논문을 읽었을때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관련 주제를 정리하셨지?'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오늘 심재훈 선생님의 페이스북을 보니 선생님도 주인장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셨고, 수업 자료로도 참고하신다고 하셔서 생각난 김에 블로그에도 소개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병준 선생님(이후 논자로 지칭)은 중국사 전문가로 고대 군현지배에 대해서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내오신 분이다. 하지만 정작 고조선 관련한 연구성과를 보면 이 분의 연구성과가 참고문헌으로 들어가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고조선> 혹은 <위만조선>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다 보니, 정작 漢의 입장에서 군현지배가 어떻게 진행됐는지까지는 살펴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암튼, 이 논문은 고고자료니, 지리고증이니 이런거 다 집어치우고 고조선 멸망과정에 대해 가장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사기』「조선열전」텍스트에만 집중해서 서술하고 있다. 논문의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논자는『사기』라는 사료의 성격에 대해 먼저 서술하고, 위만조선 멸망 직전 한나라가 멸망시켰던 주변 국가에 대한 설명을 해 이해도를 높힌다. 그리고 사료에 충실하게 전쟁의 도발-경과-고조선 내부의 붕괴 순으로 전쟁 국면을 설명하고 있다.

이 논문을 보면서 주인장이 주목했던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마천이『사기』에 관련 내용을 정리할때 기본적으로 한나라의 공식 서류를 참고했다는 점을 명시한 부분이다. 즉, 사서에 기록된 고조선 멸망 과정은 한나라가 작성한 공식 보고서에 기반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는 몇가지 의미를 내포하는데, 전쟁의 승전국인 한나라의 전쟁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전쟁 명분이 기록되었다는 점, 전공에 따라 포상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전쟁 경과 및 결과에 대해 꽤 정확한 사실을 기록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 논자는 위만조선 멸망 원인-경과-결과가 이미 한나라가 멸망시킨 남월, 동월, 굴복시킨 흉노의 사례와 유사함을 지적하며 이를 거시적인 안목(물론 승전국인 漢의 시각에서)에서 비교해 가면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즉, 한나라가 주변국을 정벌할 때 그냥 무턱대고 쳐들어간 것도 아니며, 심지어는 전쟁의 빌미를 제공해 놓고도 명분상으로는 적들이 도발해와서 어쩔 수 없이 이를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 는 식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위만조선 정벌을 이보다 이른 주변국들의 정벌에 뒤이은 것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는 논고는 많지만, 이들과 상세히 비교하여 한나라가 일관되게 주변국에 대해 전쟁을 수행해 왔음을 분명하게 밝힌 논고는 많지 않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3. 논자는 外臣에 대한 개념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 논문을 보면서 가장 주목했던 부분이기도 한데, 논자는 외신이라는 개념이 어떤 제도화된, 다시 말해 규정화되고 의무화된, 그래서 법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만, 상징적인, 그리고 관념적인 외신이라는 개념이 한나라 황제의 권력 강화와 맞물려 점점 구체화, 상세화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한 고조와 여후 시기, 문제와 경제 시기때까지는 이런 규제가 약했지만, 권력이 극강으로 비대해진 무제 시기가 되면서 외신에 대한 요구가 강화된 것이라는 지적인데, 이는 당시 한과 위만조선의 관계, 국제적 역학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4. 논자는 전쟁에 앞서 '반란'의 조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섭하가 위만조선의 비왕을 죽였기에 위만조선이 섭하를 살해했지만, 한나라 입장에서는 사건의 진위 따위는 관심없다는 것이다. 섭하가 무슨 짓을 했건 위만조선이 한나라의 신하로서 군대를 일으켜 황제에 거역했다는 점이 중요할 뿐이다. 이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기에 앞서 연개소문의 반란을 운운하면서 전쟁명분으로 삼은 것과 비슷하다. 그러면서 실제 일어난 반란과 반란을 모의한 것(모반)을 엄격히 분리해 기술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이 또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5. 논자는 누선장군 양복이 5만을 이끌고 나갔다는 대목에서 당초 죄수들을 모아 출발한 5만의 군대 중 대부분이 전장을 이탈해 결국 남은 7천여명만 이끌고 위만조선을 공격해야 했으며, 그마저도 전쟁에 패해 군대가 흩어졌다고 해석하였다. 일반적으로 이에 대해 5만의 군대 중 양복이 '우선' 7천명만 이끌고 전투를 벌인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고, 왜 5만 중 7천명만 이끌고 전투에 임했는지에 대한 사실은 크게 인지하지 못 해왔었다. 하지만 논자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지적했고, 이것이 죄수로 이뤄진 부대라면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밝혔다. 그와 더불어 남월을 공격할때의 상황과 비교하면서 위만조선 공격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어 한층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왜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한쪽은 공격을, 한쪽은 화평을 하자고 했는지, 남월 공격에 참전했던 양복의 상황과 비교하면 비로소 제대로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6.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고, 다시 한번 항복을 종용하는 사신이 왕험성에 당도하자 위만조선은 항복을 결심한다. 하지만 태자를 호위하는 부대의 무장을 해제하라고 하자 오히려 우거왕의 태자는 말머리를 돌려 돌아가 버린다. 이 부분에 대해 논자는 당시 군작제도의 규정에 대해 미리 설명하고, 한나라의 장군이나 병사들 입장에서는 항복한 사람보다는 포로를 획득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고 지적한다. 실제 한군이 항복한 자들을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았던 전례가 있음을 이유로 태자는 자신의 호위병력을 무장해제 시키려 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 부분도 단순히 생명의 위협을 태자가 느꼈구나~라고만 이해했는데, 이러한 전례를 위만조선측에서 알고 있었고, 본인들을 항복 사절이 아닌 포로로 취급하려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면 충분히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과의 교섭이 결렬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7. 논자는 조법종 교수님의 논고에서 언급한 부분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조법종 교수는 기원전 108년 우거왕이 살해되고 고조선의 지배층이 항복하면서 낙랑군이 설치되었으나, 대신 成己가 반란을 일으켜 이듬해(기원전 107년)까지 함락되지 않았으므로 고조선의 멸망은 기원전 108년이 아니라 107년이라는 주장을 했는데, 논자는 조법종 교수가 주목한 『사기』및『한서』「공신후표」의 기록들을 토대로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이 멸망했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 표를 보면 기원전 108년 6월, 우거왕 살해의 공을 세운 자들에 대한 봉후 기록과 달리 기원전 107년 3월에 성기의 반란을 진압한 자들에 대한 봉후 기록이 등장하고 있어 조법종 교수는 그 사이 9개월간 성기의 반란이 진압되지 않았다고 이해한 것인데, 논자는 공훈 내역을 가지고 심의를 거쳐 포상이 내려지는 단계까지 짧게 결정되는 것도 있지만, 길게 결정되는 사안도 있으므로 봉후 기록을 갖고 전공 시점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적고 있다. 더 나아가 논자는 해당 기록들을 취신하는 것은 좋지만, 반대로 성기의 반란이 종료된 후 '조선을 평정했고 4군을 설치했다'는『사기』의 기록이나 '원봉 3년(기원전 108년)에 4군을 설치했다'는『한서』의 기록을 취신하지 않을 때에는 그에 맞는 적절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사료 취신에 있어 어떤 자세를 갖춰야 하는지 잘 알려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상 7가지 부분 때문에 주인장은 이 논문이 당시 전쟁 상황을 아주 잘 설명한 최고의 논문으로 꼽곤 한다. 일단 남겨진 자료가 적은 상태에서 관련 사료 자체를 충실하게 살펴보고 나서, 고고자료나 기타 금석문 등을 살펴본다면 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고조선-위만조선에 대해 이해하는데 있어 이 논문이 중요한 기본 텍스트로 활용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Sagi-Chosu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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