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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고고학

시궁창싸움 아닌 진짜 토론을 한번...-풍납토성 by 블레이드님


블레이드님이 필자의 글(http://yeohwi.egloos.com/1480142#139608)과 관련된 글을 하나 써주셨는데 이제야 확인했다.
(이마저도 멍~하니 앉아서 화면을 뒤로 계속 넘기지 않았으면 못 찾았으리라...아마 한 4번 정도는 뒤로 넘긴 듯)

글이 길지 않고 내용도 간단한지라 여기에 간략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또한, 이에 대한 글이 앞으로도 계속 될 것 같기에 일단 제목도 <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로 달아뒀다.

풍납토성의 발굴도면이야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니 여기에 따로 싣지 않고 Pass~


블레이드님의 지적 포인트!

1. 현재 풍납토성 내부에서 왕성에 해당하는 초석은 발견된 바가 없다.

2. 현재 발굴된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왕궁이 정연하게 자리잡을 만한 공간은 없다.

3. 당시 고대 국가의 도성 치고 10만평 이하짜리가 없는데, 풍납토성은 너무 작다. 이는 한성백제에 대한 과소평가다.

4. 풍납토성 규모에 맞춰 사극 근초고왕에서 백제가 좆만하게(?) 나왔다. 이건 현행 연구를 반영한 결과가 아닐까?


본인의 생각!

1. 고고학과 문헌사학은 학문적으로 다르다.

블레이드님은 기본적으로 문헌사학자다. 문헌사학자는 사료 비판을 통해서 얼마든지 본인의 생각을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다. 즉,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해석하는 것은 한문을 잘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그 기록의 眞意를 간파해서 당시 시대상을 종합적으로 해독할 수 있어야 역사학 전공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고학자는 기본적으로 눈 앞에 보이는 고고자료를 통해서만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다. 즉, 그 유물에 자세한 설명서가 써 있지 않는 이상, 그 유물에 대해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물론 어느 정도는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구려 보루에서 마구류와 철제투구가 나왔다. 그럼 고고학자는 그 fact에 맞춰 그 유적과 유물을 해석해야 한다. 하지만, 이를 두고 <역사스페셜>과 같은 방송에서는 고구려 보루에 중장기병이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이건 추정의 범위이다. 중장기병이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 즉 최근에 무등리 2보루에서 나온 것과 같은 찰갑이라도 나와야 했는데, 단순히 마구류와 월형도끼, 철제투구만 갖고 그런 얘기를 했으니 말이다. 고고학자는 이렇게 얘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고고자료를 참고한 역사학자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해서 그걸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고고학자와 문헌사학자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궁극적인 목표(당대사의 복원, 당대 문화사의 복원 등)는 같다 하더라도 접근방법과 다루는 분야가 다르다. 그런데 종종 이를 오해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블레이드님 역시 마찬가지이다. 풍납토성의 현재 발굴 범위를 도면에서 살펴보면 여기저기 들쑤셔 놓은 것 같은 형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발굴지역에서 정연한 왕궁터가 있을만한 공간은 없다~그러므로 풍납토성에는 왕궁이 있을 가능성이 없다(혹은 적다)라는 것이 블레이드님의 생각이다. 하지만 고고학자라면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접근하고 속단해서도 안 된다. 일단, 풍납토성이 전면 발굴되지 않은 상황에서 땅 속에는 '백제 왕궁터가 없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고고학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발언을 할 수 있을까? 그 근거로 '현재 발굴도면을 펼쳐놓고 자! 봐라, 왕궁터가 있을만한 공간이 남지 않았다!'라고 얘기할텐가? 그건 고고학의 기본적인 방법론을 무시한 발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얘기가 아무리 나와도 고고학자들이 신경쓰지 않는 건 당연할 것이다. 일단 백제고고학 분야에 있어서는 비전공자인 필자부터도 크게 신경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이니.

기본적으로 고고학자라면, 땅을 파서 아무 것도 안 나오면 왜 아무 것도 안 나오는지도 설명해야만 한다. 현장조사의 기본적인 순서를 간단하게 언급해보자. 먼저 해당 조사지역을 발로 일일히 걸어다니면서 조사하는 지표조사가 있다. 물론 문헌기록이나 고지도, 고환경 복원과 같은 방법을 통해 해당 지역에 대한 사전정보를 입수한다. 그리고 현지에 가서 직접 유물을 수습하기도 하고, 간단한 구덩이를 파서 토층을 파악하기도 하며, 전체적으로 해당 지역의 지형 변화 등을 파악한다. 그렇게 시굴조사 범위를 확정한다. 이때 시굴조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진행될 수 있다. 사업시행자나 해당 관계자들이 모여 간단하게 입회조사 형식으로 치뤄질 수도 있고, 표본시굴조사라 하여 해당 지역의 극히 일부분(유적이 있을법한 곳을 추측해서)만 조사하는 경우, 아니면 정식으로 일정 구역마다 Trench를 설치하여 정밀조사를 하는 등 해당 지역의 유구 및 유물을 파악한다. 이때 단순히 유물만 확인된다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유물은 다른 곳에서 떠온 흙에 들어있을 수도 있고, 이런저런 자연적인 이유로도 본래의 자리에서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유물이 출토된 문화층을 확인하고, 그 문화층에서 유구(건물터나 주거지, 고분 등)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단, 해당 지역을 전면 제토(양파 껍질 벗기듯이 상면의 흙을 싹 벗기는 작업이라 생각하면 쉽다)한 것이 아니므로 땅 속에 무엇이 있는지 여부는 결국 발굴조사로 넘어가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후 발굴로 넘어가면 대부분 Trench에서 확인된 유구 이상의 것들이 확인되기 마련이다. Trench를 파지 않은 그 사이의 땅 속에도 확인되지 않은 유구가 있기 때문이다.

자아...이런 기본적인 조사 순서를 염두에 뒀을 때...해당 지역에 대한 전면제토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고고학자는 그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을 100% 이뤄낼 수 없다. 하물며 풍납토성과 같은 한정된 공간, 성벽을 기준으로 성 내부를 전면 제토하지 않는 이상 거기에 대해서 고고학자는 확답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현재까지의 고고자료 상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고, 대형건물지나 의례용 건물, 제의유구 등이 상당수 확인되었기 때문에 왕성일 것이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왕성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블레이드님도 아실 것이다. 애초에 고고학계는 내부 면적 21만㎡(약 64,000평)의 몽촌토성을 백제 왕성이라고 했다가 풍납토성이 발굴되자 84만㎡(약 254,000평)의 풍납토성을 백제 왕성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몽촌토성 발굴때는 풍납토성이 파묻혀서 안 보였다가 갑자기 등장이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몽촌토성에서는 확실한 왕궁터가 나왔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왜 그때는 풍납토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었을까? 아주 간단하다. 발굴이 안 되었으니깐. 그럼 이제 다시 돌아와서 생각해보자. 풍납토성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서 이를 능가하는 유구와 유물이 나오면 그 성이 새롭게 고고학계의 이슈화가 되면서 백제 왕성으로 주목될 것이다.

그럼 여기서!"뭐야? 그럼 고고학계는 항상 이랬다 저랬다 한단 말이야? 그게 무슨 학문이야?"라고 반문하실 분도 계실 것이다. 만약 풍납토성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유구들(대형 건물지나 제의공간 등)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래도 왕성 운운했을까? 한국 고고학계의 종합적인 견해가 모였다고 봐도 무방한『한국 고고학 강의(개정 신판)』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268~270쪽).

  • 풍납토성은 … 성 내부에서는 의례용 건물과 제의 유구, 대형 수혈건물지 등 성 축조 이후의 각종 유구와 더불어 성 축조 이전에 만들어진 3중 환호도 확인되었다. 이 환호는 백제가 성 축조 이전에 이곳을 근거지로 성장하였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몽촌토성은 … 성 내에서는 건물지와 판축대지, 수혈주거지, 저장공 등이 확인되었다. 475년 천도한 웅진성은 … 금강과 면해 공산성이, 그 서쪽으로 왕릉 구역인 송산리 고분군이 있다. 송산리 고분군 북쪽으로 금강과 면한 구릉에는 대형 벽주건물지가 발견되어 무령왕릉 비롯한 왕조의 빈전터였을 가능성이 제기된 정지산 유적이 위치해 있다. 왕궁의 위치에 대해서는 공산성 내부설과 외부설이 있다. 내부설에서 왕궁터라고 주장되는 건물지는 규모나 시기에 문제가 있으나, 공산성 외부에서 왕궁 흔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웅진성 나성의 존재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주변의 산성이 나성 역할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  …  사비도성의 가장 큰 특징은 도성을 둘러싼 나성으로 … 도성 내부에서는 너비 약 9m와 약 4m의 도로 유구가 발굴되었다.  …  도성 공간은 천도 이전에 치밀하게 계획되고 나성도 천도 이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고고학은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료를 보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아니, 그렇게 하는 학문이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왕궁터가 없음에도 고고학계에서 공인할 수 있는 '고대 국가의 도성으로서 갖춰야 할 요건'(예를 들면 판축성벽과 같이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어야만 축조 가능한 성벽, 그 내부의 대형건물지나 주거지, 환호와 같은 방어시설, 대규모 저장공 및 수혈유구와 같은 자원보존수단, 의례공간 등) 중 상당수가 있기 때문에 도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누누히 얘기하는 것이, 풍납토성이 정답은 아니지만 최선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웅진성에서는 제대로 된 왕궁터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 송산리 고분군 및 정지산 유적과 같은 제의공간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도성으로 비정 가능한 것이다. 사비도성이야 뭐 워낙 이것저것 많이 확인되었으니 당연하다고 봐도 무방하고. 즉, 풍납토성이 전면 발굴되었음에도 왕궁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라고 한다면 그때 가서 얘기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웅진성과 마찬가지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밖에 왕궁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얘기가 나올 수도 있고, 풍납토성은 왕성은 아니다, 대신 도성 주변에 위치한 거점성이었을 것이다(신라의 경우, 도성인 경주를 둘러싼 나성은 없으며, 주변에 여러 산성들이 거점성으로서 방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라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강남 일대에서 사비도성 내지와 마찬가지로 구획을 나눈 흔적이 나타나거나 풍납토성 내부에 왕궁이 확실히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풍납토성이 고대 백제의 도성이었다는 학계의 중론을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까지 발굴된 지점의 위치가 어떻다~를 떠나서, 풍납토성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밀발굴이 이뤄지지 않는 이상, 블레이드님의 주장은 그야말로 블레이드님, 그러니깐 어떤 역사학자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필자가 블레이드님께 "만약에 땅을 파서 왕궁이 나오면 어떡하실 겁니까? 왕궁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으십니까?"라고 여쭤본다면, 블레이드님이 뭐라고 하실지 궁금합니다. 만약 "확신한다! 왕궁은 없다!"라고 하신다면 전 그 근거를 물어볼테고(땅 속에 뭐 있는지 보셨습니까? 라는 식의 반론이라든가), 만약 "확신 못 한다.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하신다면 전 그럼 왜 그런 주장을 하십니까? 라고 반문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고고학자와 문헌사학자는 다르다.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이 문제는 고고학자와 문헌사학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가 힘들 것이다.

고고학을 전공하는 필자 역시 풍납토성 내부에서 왕궁터가 나오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의 범위에 속하는 것이지,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필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둘러싼 강남 지역의 개활지가 당시 백제의 경기 지방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의 왕궁이 반드시 어느 성 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성 안에 있을 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도 있다(이건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개인적으로 생각해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과, 학문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즉, 뭔가 뚜렷한게 나오기 전까지 이 문제는 답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필자는 어떻게 그렇게 없다고 확신하는지가 더 궁금하다. 땅 속을 들여다 본 것도 아닌데 말이다.


2. 왕성의 공간 구성

이 역시 필자는 의문가는 점이 많다. 블레이드님과 강찬석 선생님의 공저『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라는 책을 봐도(다 읽었는데 여태 서평을 못 쓰고 있다) 그렇고 도성의 공간 구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현재 한국 고고학계에서 고구려 후기 도성인 장안성, 백제 후기 도성인 사비, 신라의 도성인 경주에 조방제 같은 구획 설정이 있었다고는 보지만 국초부터 그런 것을 갖췄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갖췄다고 볼만한 고고자료가 없으니깐. 예를 들면 정연한 도로 유구라든가(풍납토성에서 도로 유구가 나오긴 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나온 만큼은 아니다), 계획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일만한 왕궁-제사공간-고분군-관청지 등이 확인된 바가 없으니 말이다(군데군데 잘라서 파면 확실히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고구려의 경우에도, 오녀산성이 초기 도성으로 지목되지만 어디까지나 배후 산성일 뿐이다(필자가 보기에는 배후 산성이라고 보기에도 문제점은 있다). 평지 도성이라고 볼 수 있는 하고성자성이나 나합성은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서 솔직히 '모른다!'. 그리고 평지 도성과 배후 산성 체제가 갖춰진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살펴보자. 솔직히 환도산성도 성이 크지만 성 내부에서 다수의 건물지가 확인되지는 않았다. 다소 지세가 낮고 평탄한 남쪽 일대에서 왕궁터와 병영터 등이 확인된 것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성 내부의 면적만 갖고 성이 넓다, 좁다를 따질 필요가 있을까 싶다(그렇게 따진다면 환도산성 안에는 아주 많이 쳐봤자 채 1,000명도 살지 못 했을 것이다. 그만한 사람들이 살만한 주거지가 확인되지 않았으니. 그렇다고 환도산성이 풍납토성보다 더 위계가 높다, 낮다를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한 '안학궁'과 '대성산성'만 살펴봐도 중심지만 확인되었지 그 주변으로 있었을 생활유적(일반 거주민의 주거지 등)이나 생산유적(가마터, 제철관련 유적 등)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조사된 바는 없다. 다만,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인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략적으로 그 곳들을 고구려의 도성으로 이해한다.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그만큼도 제대로 조사되지 않은 한성백제의 도성 문제를 지금 속단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 왕성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이 학문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다만, 그것이 경제적인 문제와 결부되면서 변질된 것이지. 블레이드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다른 온라인 공간에서 토론이 진행될 때에도 애초에 강찬석 선생님과 필자 사이에 학문적인 토론이 이뤄졌다. 하지만 곧 다른 사람들(풍납동 거주민 혹은 관련 주민 등)이 끼어들면서 토론의 방향은 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므로 지금의 경제개발 제재조치는 풀어져야 한다~는 식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이 부분은 블레이드님이 얘기하지 않으셨는데, 그래서 결국 토론은 토론답게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인터넷에서의 토론 운운한 글을 올린 것이고). 그 순간, 딱 정내미가 떨어지면서 그치들과 이야기가 하기 싫어졌고...암튼, 여기서도 이야기가 조금 샜다. 다시 돌아와서...

한성백제의 도성 구조가 어떤지 아는 사람 한번 손 들어보십쇼!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비도성이 그러했으니, 한성백제의 도성도 그러했을 것이다~는 큰 의미가 없다. 강찬석 선생님과 블레이드님이 쓰신 책을 보니 중국 고대 도성제도도 언급하고, 조선시대 학자들의 견해도 인용을 하셨는데...그건 어디까지나 주변 자료를 통한 '방증'일 뿐이다(아시겠지만 방증은 그야말로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주변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밝힐 수 있는 정황을 통한 것이다). 이는 마치 한때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을 두고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나오는 지석과 작성 방법(혹은 표기법)이 다르기 때문에, 백제 무령왕이 중국에서 받은 책봉명을 적었기 때문에 조작되었다~가짜다~라는 이야기가 떠돈 것과 무엇이 다르겠냐 이거다. 백제 역사 전시기를 두고 한성기와 사비기가 반드시 같아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 더 억지스러움이 아닐까 싶다.

이건 농담이지만...혹시 아는가? 한성백제의 왕성이 추상적으로 구불구불하게 자리잡았을지. 이건 어느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고고학자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상식적으로 그건 말이 안 된다~라고 해서 쉽게 넘겨서는 안 된다. 지금껏 그렇게 상식에 위배되는 수많은 고고자료들이 계속 나왔기 때문에 고고학이 계속 발전해 왔으니 말이다.


3. 풍납토성의 규모

풍납토성의 규모가 10만평이라고 하시는데 이건 무슨 자료를 기준으로 삼으신 것인지 궁금하다. 당장『한국 고고학 강의』만 봐도 풍납토성은 20만평이 넘는데 말이다. 또한, 예전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풍납토성 관련 특별전을 했을 때 발간한 도록에도 토성의 면적은 총 26만평으로 잡고 있다. 지금 다시 블레이드님의 책을 보니 거기에는 17만평(18쪽)이라고 적혀 있고...궁금하다. 어떤 자료를 인용한 것인지, 물론 공인된 자료를 인용하셨겠지만, 확인차 다시 여쭙고 싶다.


4. 최근 연구성과와 사극

에이...이건 그냥 농담한 것이라 생각하겠다.
사극이 언제부터 그렇게 최근 연구성과를 잘 반영했다고 그러시는지. ^^;;
그래서 광개토태왕은 그렇게 만들었단 말인가...사극에서 백제가 그렇게 그려졌다고 해서 그걸 풍납토성의 연구성과 혹은 경향과 연결짓는 것은 정말 순수하게 농담으로만 받아들이겠다.


이상이다. 쓸떼없이 별로 한말도 없는데 글이 길어졌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고고학과 문헌사학은 다르다.

문헌사학자(혹은 다른 분야의 전공자)가 발굴보고서의 내용을 보고 얼마든지 자료를 재해석하는 것은 자유이다.

하지만 고고학자가 발굴보고서 이상의 해석을 내리는 데에는 그에 따르는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고고자료로서의!

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라면, 왕성이 아닌 이유를 고고학적으로, 직접적으로 해석할 의무 혹은 책임이 있다.

백제 왕성이 다른 곳에 있다면 그에 맞는 고고자료를 대야만 한다. 하지만 필자가 알기로 그만큼 발굴조사된 곳은 없다.

고고학과 문헌사학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각 학문의 특징을 이해하지 않는 이상 그건 무리이다.

문헌사학자 중 고고학을 자세하게 이해하고, 알고, 비판 혹은 반박하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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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루치까 2011/06/10 04:21 # 답글

    고대사에 대한 지식은 학부 전공으로 들은 것이 거의 전부이기는 하지만, 4. 에 대해서는 실제로 백제의 왕성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본격적으로 백제가 금강 이남 지역을 직할 통치 할 수 있던 시기가 언제인가에 따라서 백제의 영역이 많이 왔다갔다 하고, 실제로 이에 대한 논쟁도 많으니까요.

    여하튼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역시 문헌사학과 고고학은 상호 보완의 관계이지, 한쪽의 근거로 다른 한쪽의 근거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습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04:34 #

    왕성과 도성은 엄밀히 구분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왕성은 그야말로 왕궁을 포괄하는 범위이며, 도성은 왕성은 물론 일반 거주민과 관청지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봤을때 한성백제의 도성이 강남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요. 다만 문제는 그 Center가 어디이냐~는 것 뿐일 겁니다. 그 상황에서 센터가 될만한 중심지는 당연히 왕성일 테고요.

    그런 상황에서 왕성은 클 수도 있지만, 작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오히려 왕성보다 도성의 규모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싶어서 말이죠. 솔직히 고구려 전반기의 도성으로 쭉~사용되었던 국내성도 그렇게 크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국내성부터 환도산성 사이의 지역이 모두 도성 범위에 포함된다면 고구려의 도성은 상당히 넓은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라 봐야겠지요. 적어도 4세기때, 전연의 모용황이 도성에서 잡아갔다는 남녀 5만명이 살 정도의 면적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5만명이 살 집과 그들이 농사짓는 터전과 도성 주변의 고분군을 관리할 사람들, 전쟁터에 참전한 5만 5천명 중 도성에 터전을 두고 있는 사람들...까지 다 고려한다면, 도성의 범위는 상당했을 것입니다)

    또한...저는 백제가 금강 이남 지역을 직접지배하게 된 6세기(영산강 유역가지 다 차지한) 이전에도 직-간접적으로 수직적인 통치체제가 정비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국력의 총 규모와 왕성(도성이 아니라)의 규모가 반드시 정비례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상관관계는 있겠지만요. 더불어 저는 백제를 이원화된 체제로 이해하고 있어서 4세기 말~5세기 초 광개토태왕에게 백제가 깨져나가기 이전의 한성백제는 그 지배 범위 및 통치권이 그다지 넓지 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암튼...문헌사학과 고고학(특히 역사고고학)은 결국 같이 가야 합니다. 그럴려면 양쪽을 다 전공한 전공자가 연구를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하지만 그게 돼지 않는다면, 결국 양자가 상대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느냐~가 관건일 것입니다.
  • 루치까 2011/06/10 04:59 #

    악. 단순한 생각일 뿐이었는데 이런 자세한 덧글을 달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결과적으로 풍납토성-몽촌토성의 관계를 왕성-도성으로 이원화시키는 설도 비판해볼 필요성이 있겠군요. 막연히 백제 왕족이 고구려계에서 파생되었으니 똑같이 이원도성체계를 갖췄을 것이다...라는 얘기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05:08 #

    그 역시 지나치게 단순화된 도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풍납토성-몽촌토성을 묶는 보다 큰 구획이 있었다고 전 생각합니다.

    더불어 고구려에서 살던 사람들이 내려와 나라를 세웠으니 그 도성체제를 따랐을 것이다...하지만 제가 말했듯이 고구려 초기에도 이원화된 도성체제(평지도성+배후산성)가 있었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일단, 오녀산성이 일반 배후산성과 입지나 규모 면에서 차이가 있고, 평지도성이 될만한 것이 제대로 조사가 돼지 않았기 때문이죠.

    또한...고구려의 국가 경영 경험이 있던 자들이라 해서 무조건 고구려를 따랐을 것이다~도 문제가 있습니다. 여건이 고구려와 다르다면 그들은 분명 현지 사정에 맞게끔 국가 경형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마치 고구려 사람들이 부여에서 내려와 국가를 세웠다지만, 묘제는 현지의 적석총을 도입한 것처럼 말이죠. 북방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의 최고 신분으로 살던 사람들이 한반도로 남하해 한강변에 첫 터전을 잡았다면...과연 그들은 어떻게 도읍을 정했을까요??

    개활지와 산악지대는 확실히 달랐을텐데 말입니다...^^
  • 번동아제 2011/06/10 05:27 # 답글

    제가 성곽 외의 일반 건축쪽은 완전 무지해서 엉터리 같은 질문일수도 있는데...

    한성 백제의 궁전 건축이 초석을 사용하는 방식의 건물이 아니라 이른바 대벽식 건축, 혹은 벽주식 건축일 가능성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대벽식이라면 초석이 아예 없을 수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11:53 #

    아~정지산 유적 등에서 대벽건물지가 확인된 바가 있긴 있습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대벽건물지는 벽체를 다 세워서, 그 벽체 자체가 상부 구조를 지탱하기 때문에 큰 건물지에 사용되기는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물론 일본의 경우, 대벽건물지임에도 거대한 건물지가 있긴 합니다(예전에 오사카를 갔다가 방문한 현장에서 봤는데, 사진과 정확한 명칭은 추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어렴훗이 기억만 납니다). 하지만, 그러한 구조의 건물지가 일반적인 방식은 아닌 듯 합니다(적어도 3~4세기 이른 시기의 한국의 고대 국가에서).

    하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제가 볼때 지금 블레이드님도 지적하시고, 다른 사람들도 문제를 삼는 부분은...건물지 1기 자체의 크기가 아니라, 여러 동으로 이뤄진 건물군이 없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런 부분은 의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고요. 전 개인적으로 초석이 없이도 건물군이 갖춰져 있다면 그것을 왕궁으로 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정황상 왕궁으로 볼만한 것이 없긴 합니다.(어디까지나 제 사견입니다)
  • 번동아제 2011/06/10 05:33 # 답글

    저번에 보내주신 사진은 아무리 봐도 한숨만 나오네요. 일단 저런 찰들을 리벳 방식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너무 예외적인 형태이므로 모종의 이유로 투공이 막힌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별 문제가 없는데...

    넙적한 조각은 찰갑의 부속으로 보기엔 유례가 없는듯해서, 정식으로 전체 갑옷이 출토되지 않는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억지로 상상을 해보자면....

    사실 중국의 명광개에서 가슴 부분이 실제로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해서는 중국이나 일본 학계에서도 아직 뚜렷한 방향으로 의견 수렴을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명광개에서 가슴 부분의 갑옷이 찰갑의 철찰보다 대형의 철판을 조합하는 방식이고 여기에 다른 부속부는 소형 철찰을 결합하는 방식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번에 발굴된 것이 혹시 이 같은 이중적인 구성의 갑옷이 아닐런지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현재 수준의 사진만으로는 지나치게 모험적인 추정이라 그냥 말만 던져 놓고 도망갑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13:49 #

    흐음...번동아제님이 보시기에도 찰들의 투공이 막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군요...

    하긴, 그 시기에 그런 모든 투공을 리벳 방식으로 결합한 갑주가 나오면 좀 난감한 거겠죠? -.-;;

    그나저나 명광개 얘기는 재밌습니다. 아직 뚜렷한 견해들이 없군요...흐음. 이번에 고구려 갑주만의 독특한 구조가 밝혀지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저도~~
  • 번동아제 2011/06/10 05:39 # 답글

    이 글하고는 직접 상관은 없는데 지난 2003년에 충북대 중원문화재연구소에서 나온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를 며칠 전에 구입을 해서 읽어보니 옥천 일대의 신라-백제 국경지역에 소규모 보루가 무더기로 존재하더군요.

    정식 발굴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지표조사 보고서라 그 이후 연구가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것들이 모두 보루가 맞다면 고구려권 보루와 비교사적 검토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13:53 #

    헉! 그걸 구입을 하셨단 말입니까??? -.-;;;

    흐음...제가 매년 발굴조사보고서 복권을 온라인상에 뿌리곤 했는데...올해에는 넘어갔더니...

    나중에 보고서 복권을 좀 정리해서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필요한 책이 있으면 보내드리지요.

    암튼...

    신라-백제 국경 지역의 소규모 보루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연구가 진전된 바가 없습니다. 음~그러니깐 논문 몇편에 소개된 적은 있습니다(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한 2편 정도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식 발굴은 돼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보루만큼의 논의가 진전되지도 않았고요. 또한 당시 그 논문을 봤을때의 제 기억을 더듬어보자면...고구려 보루만큼 보루의 정의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정리된 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소규모 산성과 보루를 헤깔리는 뭐 그런 식의 시각이 보였거든요...

    암튼, 보루라고 볼만한 전초기지적인 성격의 관방시설은 북방의 부여에도 있었고, 흑룡강 일대에도 있다고 하는데...제대로 조사된 것은 역시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와 임진강 일대의 보루 뿐입니다.
  • 슈타인호프 2011/06/10 08:24 # 답글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다른 드릴 건 없고 추천 하나 올려드리고 갑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13:53 #

    아 네~ 감사합니다. ^^
  • 행인1 2011/06/10 09:05 # 답글

    사실 그분은 워낙 '신학설'을 과감하게 펼치시는 분이라서...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13:54 #

    저는 개인적으로 블레이드님의 과감하고 결단력있는 그런 모습을 좋아합니다.

    역사학계에 그런 분이 계시다는 것은 부정적인 면모보다 긍정적인 면모가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고고학이라는 분야에서만큼은 저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많아 그런 부분에 대해 얘기를 하는 것 뿐입니다. ^^
  • 맹꽁이서당 2011/06/10 09:09 # 답글

    예전에 대륙삼국설(더 나아가 대륙 고려, 조선설)을 주장하는 책을 서점에서 봤었는데, 일반적인 지석은 이러이러해야 하는데~ 라는 논거로 무령왕릉 조작설을 설파하더군요. 언급하신 내용을 읽으니 그 책이 생각나네요.
    하여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13:55 #

    ㅋㅋ 그 책은 뭔지 대강 알 것 같습니다.

    그러한 조작설은 신채호 쌤의 말을 빌리자면 '我와 非我'를 제대로 구분해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 합니다.

    중국이 그러하니, 우리도 그럴 것이다. 고구려가 그러하니, 백제도 그럴 것이다...

    그건 누구도 모르는 겁니다. ^^

    암튼 잘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 천지화랑 2011/06/10 10:39 # 답글

    솔직히 지금 평양시내 파면 고구려 평양성의 흔적을 찾을수는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ㅁ-;;

    아 이러면 또 대륙평양설 나오려나요.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13:57 #

    음...평양 시내를 파면 아마도...

    현재 서울 시내를 팠을때 '일제시대 문화층 - 17~18세기 문화층 - 15~16세기 문화층' 등으로 차례차례 누충적으로 중복된 문화층이 확인되는 것처럼, 조선-고려-삼국시대의 문화층이 확인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서울만큼 평양이 대규모 고층건물군이 여기저기 있는 것도 아니므로 그만큼 땅 속의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뭐 혹시 모르죠. 장안성 내부에 있었다는 방격 구획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요. ^^
  • 라디오 2011/06/10 10:40 # 답글

    풍납토성을 왕궁으로 주장했던 자들은 언젠가는 역사의 단죄를 받을테지..
  • 긁적 2011/06/10 13:08 #

    ....... 이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13:57 #

    어떤 단죄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
  • 소심쟁이 2011/06/10 11:24 # 답글

    결론: 더 파봐야 왕성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맞나..;;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13:58 #

    네~제 생각은 일단 그렇습니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결과로 봤을때 왕성이다...는 아닙니다.
  • 들꽃향기 2011/06/10 11:35 # 답글

    1. 잘 읽었습니다. ^^ 말씀대로 고고학계에서는 나온 유물에 충실하게 논의를 편제해야하고, 그것이 '정답은 아니지만 최선'이라는 한마디로 잘 요약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리고 고고학계인은 아니지만 그 말씀에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2. 개인적으로는 풍납토성이 왕성이었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일단 묘제에서부터 한성백제 시대의 유구로 추정되는 무덤들과 송산리 고분군의 묘제 양식이 다른데, 도성의 구조(사비도성과 한성백제의 도성)까지 동일할 가능성은 개인적으로 적다고 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14:00 #

    1. 잘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잘 읽을만한 것도 없는데요. ^^; ㅋ

    2. 백제의 경우, 고구려 혹은 신라와 다른 국가구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성기-웅진기-사비기의 문화 양상은 차이가 크다고 봅니다. 이는 단순히 국내성기-평양기(제가 그냥 임의로 나눈 것입니다. 지금. -.-;)의 고구려와는 문화 양상이 다르죠. 지배계급과 통치체제가 매 시기마다 큰 변화를 겪었던 백제였기에...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아니, 같은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고 해야 더 옳겠지요. ^^;;
  • 마광팔 2011/06/10 12:28 # 답글

    한사군하고는 아무런 관련없는 평양 지역 유물을 아직도 강단 식민빠들은 한사군 유물이라고 우기는 작태를 볼 때 고고학적 발굴과 그에 따른 올바른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낍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14:04 #

    마광팔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

    한사군과 관련이 있든 없든 평양 지역에서는 전한대 유물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단, 이것이 한사군과 관련이 있느냐 없느냐는 뭐 제가 비전공자라서 더 자세히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다만, 이것 하나는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1. 과거 일제의 고고학적 연구성과는 현재 재평가받고 있으며, 그 결과 꽤 괄목할만한 연구성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과거 무조건 낙랑군의 것이라 평가받던 유물이 이제는 교역에 의한 것, 혹은 재지계 위만조선인이 만든 것 등으로 재분류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재평가가 이뤄지다 보면 조만간 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질 것입니다.

    2. 북한의 고고학 수준이 현재는 아주 낮은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조선고고연구』에 나온 연구성과를 그대로 믿기는 힘든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서 직접 파보기도 어려운 상태고요. 고로 추후 남-북한의 학문적인 연계가 더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며, 북한의 현재 발굴성과도 과거 일제의 연구성과만큼 우리가 걸러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암튼, 평양은 한사군이다! 혹은 평양은 한사군이 아니다! 라고 전제를 깔지 않고...

    일단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근거로 0부터 다시 차근차근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 2011/06/10 14:5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15:30 #

    ㅋ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래도 이쪽에서 악의적으로 하지 않으면 일단 그쪽도 악의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그쪽에서 악의적으로 덤빈다면 님하의 말씀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

    감사감사~
  • 누군가의친구 2011/06/10 15:01 # 답글

    하긴 발굴이 모두 완료되어야 할지 어떻게 아니다 맞다를 결정짓겠습니까? 사실 서울 자체가 도시다보니 재개발이나 공사등을 하다보면 다양한 시대의 유물이 나오곤 하는데 말입니다.(그것도 서울이라는 지역 자체가 여러 왕조에게 중요지역이다보니 말이죠.) 좀더 발굴이 진척된다면 지금보다는 더 정확한 결과가 있을거라 믿습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6/10 15:31 #

    네~반드시 그래야겠지요.

    경제 논리에 밀려 더 이상 문화재가 파괴되는 일도 없어야 하고, 문화재 논리에 밀려 주민들의 삶이 피해를 입지도 말아야 하겠죠.

    전직 대통령들 비자금 잔뜩 걷어서...이런데에나 좀 쓰지 싶습니다. ㅋㅋ
  • 2011/06/10 17:1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6/11 00:10 #

    풉~그랬군요. ㅋㅋ 알겠습니다. 그 역시도 기억하겠습니다. ㅋㅋ
  • 사과향기 2011/06/10 18:41 # 답글

    좋은 내용 잘보고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
  • Warfare Archaeology 2011/06/11 00:11 #

    아닙니다. 저도 그냥 공부하는 학생일 뿐인데요. 도움되셨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
  • 여신 2011/08/29 21:51 # 삭제 답글

    풍납토성왕성여부에 대해서 조사한는게 숙제였는데 진짜 도움이됬어요 감사해요!
  • Warfare Archaeology 2011/08/29 23:30 #

    아~그러셨군요. 옛날에 쓴 글인데,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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