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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 2 고고학

왕궁과 왕성, 도성 by 블레이드님

아직 첫번째 문제가 마무리되지 않았기에 제목은 계속 (1)-2로 이어지겠다.

1. 블레이드님이 '왕궁이 없어도 왕성으로 칠 수 있다'가 아니라, '아직 왕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성이라는 주장을 철회하기에는 이르다'로 가는게 정상이지 않냐고 하셨다. 음~뉘앙스의 차이가 있지만, 이렇게 놓고 보니 필자의 말이 좀 더 직설적이라는 생각이 다시 든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다(물론 블레이드님이 이렇게 생각하신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직 왕궁에 대한 뚜렷한 존재 여부(있다, 없다)가 확인되지 않았기에 왕성이라는 주장을 철회하기에는 이르다.


뭐 이건 표현의 차이라고 생각하며, 동의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다만, 왕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고학계에서 왜 그곳을 왕성으로 언급하는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앞선 글의 1번은 그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한 것임을 재삼 밝히는 바이다(고고학과 문헌사학이 다르다는 점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블레이드님의 생각이 문헌사학계에서는 통용될 수 있겠지만, 왜 그것이 고고학계에 전적으로 영향을 못 끼치는 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싶다. 단순히 학계의 중론을 뒤집기에 특정 학교 출신들이 그 학계를 꽉 잡고 있기 때문이다~정도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양자의 생각과 접근법이 다르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물론 필자가 한국 고고학계에서 '고대 국가 형성의 충분 · 필요 조건'으로 요구하는 몇가지 사례들을 전부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현재 풍납토성에서 나오는 흔적들은 일국의 '왕성'으로 '보지 않기에'는 상당히 많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고학자들 또한 이 정도의 고고자료가 나오는데 이 곳을 왕성으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다들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일테고...이 차이를 이해하시지 않는다면, 이 부분은 블레이드님과 필자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일 뿐이라 생각한다. 거듭 얘기하지만, 단순히 왕궁이 있다 없다만 갖고 고고학자들이 일국의 왕성을 판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만 해도, 왕궁이 없으면 왕성이라 할 수 없다~는 블레이드님의 주장은 충분히 공감한다. 그럼에도 왜 계속 다른 이야기를 하는지, 이게 단순히 억지인지는 블레이드님이 판단하실 문제라고 생각한다.


2. 용어 문제도 상당 부분 인정하겠다. 풍납토성을 얘기하면서 초반부에 왜 갑자기 도성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 (아마 왕성이라는 표현을 잘 안 쓰는데 쓰다보니 헤깔렸던 듯) 암튼...개념 정리 중요하다. 또한, 이를 두고 어떻게 악용되는지 사례를 얘기하셨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잘 모르는 부분을 잘 모른다, 혹은 잘못됐다~라고 하지 않기 위해(하기 싫어서겠지만) 말장난을 치는 경우가 간혹 있으니깐. 애매하게~

암튼, 강찬석 쌤과 블레이드님의 용어 정리를 살펴보겠다.

왕궁 - 왕족이 살고, 집무를 하는 등의 역할을 하는 공간 ≒ 청와대
왕성 - 왕궁+민가를 포함한 성(성벽이 없을 수도 있으니 필자는 추후 공간으로 이해하겠다) ≒ 서울
도성 - 왕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지어진 다른 성들까지 포함한 공간 ≒ 수도권


그리 어려운 개념도 아니고,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하기에 대체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럼, 필자가 생각하는 용어에 대해서도 여기에 간략하게 정리를 해야할 것 같다. 필자는 일단 왕궁이라는 개념은 동일하게 여기지만 왕성이라는 부분을 좀 다르게 생각한다(이는 강찬석 쌤과 다음까페에서 벌였던 토론과정에서 차이점을 느꼈기 때문에 이렇게 적는 것이다. 강찬석 쌤과 블레이드님의 생각이 큰 차이가 없다는 전제 하에 서술하는 것이므로, 차이가 있다면 얘기해 주시기 바란다). 왕성은 왕궁과 민가를 포함한 '성'이라고 하셨는데, 필자는 이것을 굳이 성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왜냐하면 당장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주욱 지목되어 왔던(최근에는 아니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를 수용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오녀산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왕궁이 있으니 왕성? 하지만 오녀산성에서 발견된 주거지는 몇기 돼지 않는다. 그럼 왕궁과 그에 딸린 부속건물지만 있으니 왕궁? 그리고 고구려의 경우, 평지도성과 배후산성이라는 개념을 흔히들 적용한다. 고구려 초기에는 하고성자성이나 나합성의 평지도성으로서의 근거가 희박하니깐 제외하자. 그럼 중기때의 국내성과 환도산성(산성자산성)을 비교해보자. 국내성 안에서는 왕궁터가 나왔다. 환도산성에서도 왕궁터가 나왔다(별궁이겠지만). 일단, 두 군데 모두 왕궁이 있다. 그런데 환도산성 안에서 발견된 민가의 흔적은 없다(고고학적으로 얘기하면 주거지 혹은 기타 건물지 등). 흔히 환도산성의 거대한 규모만 언급하는데, 성벽을 1바퀴 돌아보면서 성내를 주욱 살펴보면 사면의 경사도가 심한 지형이 많으며, 일단 고고학적으로 성내에서 민가로 볼만한 주거지들은 확인되지 않았다(아! 서북쪽 모서리 성벽 상면에서 다량의 기와편이 수습되었고, 이를 통해 성벽 윗부분에 각루와 같은 건물터가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이는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환도산성 유구배치도를 구할 수 있으니 Pass하겠다. 그럼, 환도산성은 뭘로 봐야 하는가? 안에서 왕궁만 확인되었으니 왕성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지만 국내성은 왕궁과 주거지가 나왔으니 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국내성과 환도산성 사이의 넓은 개활지+고분군 등을 포함하는 구역은 그럼 도성인가? 왕성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블레이드님이 언급하는 '왕궁+민가=왕성'이라는 개념에서 민가의 규모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가 문제가 돼기 때문이다. 4세기 중엽 고구려가 모용황에게 발렸을 때 남녀 5만명이 끌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환도산성 안에는 일단 5만명이 살만한 주거지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건 국내성도 마찬가지다. 국내성 내부(성이라고 블레이드님이 그러셨으니)에는 그만한 주거지도 없고, 그럴만한 면적도 아니다. 그래서 필자가 보기에 국내성과 환도산성 사이의 개활지에 당시 고구려 주민들 대다수가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국내성~환도산성 사이의 공간은 블레이드님 개념으로 따져본다면 도성이라기 보다는 일단 왕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도성은 그보다 더 넓은 범위, 국내성으로 향하는 교통로 상에 위치한 관애나 주변의 여러 성들까지 포함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렇게 된다면 당시 도성은 상당히 넓은 범위까지로 확대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지금의 수도권을 과거의 도성과 연결시키기에는 현재의 수도권은 지극히 너무 넓은 감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헌사학계에서는 지금의 수도권을 과거의 도성과 비슷하다고 이해할지 모르지만 고고학계에서는 그러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상위의 거점과 하위의 거점이 하나의 세트를 이뤄 어떤 정치체의 중심지로 인정될 수는 있지만, 몇단계 하위의 거점까지 도성으로 볼 수 있느냐~의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고고자료만으로 밝혀내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도 있고). 또한, 아무래도 고고자료를 갖고 판단해야 하므로, 여러 거점들 사이의 모든 지점이 다 발굴조사가 돼지 못 하는 상황에서, 수도권과 같이 넓은 면적을 다 포괄하는 개념이 그 안에서 나올 수가 없다. 아무래도 포인트 별로 유적이 확인되기 때문이다(추론은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추론에서 끝나야만 한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일단 필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왕성으로 이해한다(그렇다고 풍납이 평지도성이고, 몽촌이 배후산성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백제가 고구려계가 세운 나라이므로, 그 나라의 도성체제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신데 일단 국초부터 백제가 풍납토성과 같은 거대한 성벽을 축조했다고 보지 않고 있으며, 몽촌이 '감히' 산성이라고 할만한 수준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고구려부터도 당장 국초부터 그러한 도성체제가 완비되었다고 보기에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안에서 왕궁이 나오지 않았으니, 블레이드님은 부정하시겠지만~ 그리고 몽촌과 풍납 사이의 넓은 개활지, 이미 조사가 불가능한 지역 또한 왕성으로 이해한다. 왕성이 반드시 성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생각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제한적인 범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경주의 예를 들자면, 나성은 없지만 주변에 위치한 산성들로 어느 정도 공간적인 범위는 제한되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의 경주는 블레이드님 생각에 의한다면 왕성일 수도 있고, 도성일 수도 있을 듯 싶다. 왕궁과 민가가 같이 확인되는 것만 따진다면 왕성이겠지만, 주변에서 확인되는 산성들을 생각한다면 도성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답변을 좀 기대하는 바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짐작하시겠지만, 필자의 경우, 왕성과 도성은 큰 차이가 없는 용어로 혼용하고 있다(王都라는 표현도 사용하질 않는가. 양자를 굳이 나눌 필요가 있을까 싶다). 뒤에 '-성'자가 붙기 때문에, 이를 수도권과 같은 지극히 넓은 광역적인 용어로 쓰이기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럼 도성도 뒤에 성 자가 붙지 않느냐고 하실지도 모르겠다. 그게 굳이 문제가 된다면 도성 대신 왕도라는 개념을 쓰도록 하겠다. 다만, 고고학계에서 도성이라 한다면 그건 단순히 성으로 둘러싸인 나라의 중심지라는 표현보다는 단순히 '서울'이라는 개념으로 쓰기 때문에 이렇게 쓰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도성도 서울이고, 서울도 서울인 것처럼). 그렇게 봤을때 오히려 왕성이라는 용어보다는 도성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 편이다(왕성은 지극히 왕궁이 있는 성이라는 뜻으로 쓰일 수 밖에 없지만, 일국의 중심지가 왕성이라고 했을때 도성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블레이드님이 말씀하시는 도성, 수도권과 비슷한 개념을 필자는 '경기(京畿)'라는 표현으로 종종 표현하곤 한다. 이 용어의 뜻은 문헌사학자인 블레이드님이 더 잘 아실 것이다(물론 블레이드님이 경기라는 용어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안 적어주셨으니 이는 성급한 발언일 수도 있지만, 그럼 도성과 경기의 차이에 대한 생각은 있으신지도 여쭙고 싶다).

그럼 정리하도록 하겠다.

문헌사학계에서 왕궁-왕성-도성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개인적으로 잘 모른다(블레이드님의 구분이 블레이드님과 강찬석 쌤만의 생각인지, 어느 정도 문헌사학계의 중론이 반영된 것인지도).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나눈다면 왕성과 도성의 구분은 애매해진다는 것이 필자 개인적인 생각이다.

일단 왕궁은 뭐 따질만한 것이 없으니 Pass다. 하지만 왕성을 왕궁과 민가가 같이 있는 '성'이라고 한정짓는다면, 전제조건을 달아야 한다. "단 1기의 주거지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 성은 왕성이다. 대신 '성'이라고 했기 때문에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럼 고구려 초기 왕성은 오녀산성이다. 중기 왕성은 국내성이고, 후기 왕성은 장안성(평양성)이다. 그렇게 본다면 초기 도성은 오녀산성과 하고성자성이나 나합성 사이의 공간이며, 중기 도성은 국내성과 환도산성 사이의 공간이며, 후기 도성은 안학궁과 대성산성 사이의 공간(여기에 왕성은 없다. 왜냐하면 안학궁을 포함한 민가+성벽 구간은 없으므로) 및 장안성과 그 주변 일정 구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는 장안성 축조 이전에 왕성이 없던 나라가 되어 버린다(도성은 있지만-.-;).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블레이드님이 얘기하시는 민가의 규모는 단 1기가 아닐 것이다. 어느 정도 번화가도 있고, 성 내부에서 각종 생산활동을 수행하는 꽤 많은 주거지를 언급하시는 것 같다. 그렇게 봤을때 고구려 초기, 중기, 후기의 왕성은 모두 없다(그만한 주거지가 나온 사례가 없으니깐). 그저 왕궁과 도성만 있을 뿐이다(도성 내부에는 확인되는 주거지는 필요조건이 아니라 충분조건이므로, 주거지 이외에 다른 부속 건물지나 시설물이 나오면 도성이라 볼 수가 있다. 블레이드님도 포괄적인 의미에서 공간적인 개념만 부여하기도 했고). 이처럼 왕성과 도성을 굳이 나눠야 하는가 싶다. 물론 문헌사학자들이야 주거지 수천기가 나오지 않아도 '당연히' 그 사이에 민가도 있었겠지~라고 할 수 있지만, 고고학자는 아니다. 눈에 안 보이면, 추론의 영역이고,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 된다.

백제를 한번 살펴보자. 일단 블레이드님의 생각대로라면, 하남시 일대가 도성(수도권)이고, 풍납토성은 그 서북쪽 모서리에 해당하는 평지성일 뿐이다(토론에서 나온 건 아니지만 책에 그렇게 나왔으니 잠시 인용하겠다. 문제가 되면 추후 수정하겠다). 자아~하남시 일대에서 왕궁이 나오지 않았다. 왕궁을 둘러싼 왕성도 없다(왕궁이 없으니, 당연히 왕성도 없을 터~이성산성에서도 왕궁은 나오지 않았다. 주거지도 마찬가지이고). 그저 도성만 있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고구려의 경우에는 왕궁이라도 있고, 일부 주거지라도 확인된 바가 있는데 하남시 일대에서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블레이드님 논지대로라면 오히려 일반 주거지가 나온 풍납토성이 더 주목되어야만 할 것이다. 공산성 내부에서도 주거지는 없으며, 임류각만 있다. 임류각을 왕궁(적어도 그 일부)이라고 하자. 공산성은 왕성인가? 아닌가? 공산성 밖으로 송산리 고분군과 벽주 건물지는 확인되었다. 그럼 공산성 주변은 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왕성은 없다. 사비기로 넘어가보자. 부소산성 내부에서 왕궁이 나왔는가? 하지만 그 밖으로 군수리사지라든가, 동남리 유적, 관북리 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나성도 확인되었고. 그래서 그 내부를 '도성'으로 명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왕성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까? 왕궁과 민가가 꼭 단일한 성 안에 들어가야만 생각하는가?

신라의 경주야 아까 얘기했지만...월성은 왕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 고분군과 주거지가 있었겠지만 문제는 이를 둘러싼 성벽은 딱히 없다. 그럼 왕성은 없다. 경주의 외곽에는 나성이 없고, 대신 경주 주변의 요충지마다 성곽을 배치해서 방어력을 높혔다. 월성 남쪽의 도당산토성과 남산토성 및 고허성, 동쪽의 명활산토성, 서쪽의 서형산성 등이 그것이다. 물론 그 외곽으로 나가면 서쪽에 작성, 북쪽에 양동리토성, 남쪽에 순지리토성이 있는데 블레이드님이 전술한 성까지가 '왕성'이고, 후술한 성까지는 '도성'이라고 한다면야 그에 대해 반대할 의사는 없다.

다만, 고고학적으로 블레이드님이 제시한 왕성의 개념은 상당히 모호한 것으로서, 이는 도성과 혼용해서 써도 무방하고, 고고학계에서는 도성이라는 표현은 쓰되, 왕성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밝혀두고 싶다(왕궁과 민가가 같이 있는 성이 왕성이라면, 블레이드님께 오히려 되묻고 싶다. 그런 왕성의 사례가 한국 고대사에 어디가 있으며, 얼마나 있냐고? 그래서 그걸 보편적인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즉, 블레이드님의 주장은 고고학계를 설득시킬만한 용어 사용을 하지 않고 있으며, 고고학계와 같은 용어('도성')를 두고 서로 다른 식으로 이해하고 있어 그 간극을 메우기가 쉽지 않다. 물론, 풍납토성이 도성의 일부라고 했을 때 블레이드님의 생각처럼 일산이나 용인 같은 도시에 방점을 찍고 여기도 수도권이니 상관없다~는 '악용'되는 사례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고고학자가 도성의 개념을 블레이드님처럼 생각했을 때의 문제이다(이제 좀 이해가 간다. 왜 강찬석 쌤과 다음까페에서 토론했을 때 분명 차근차근 얘기를 했음에도 서로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는지를. 블레이드님의 용어 정리같은게 한번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아쉽다. -.;). 고고학자는 일반적으로 도성을 수도권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하는 서울 일대(지금의 서울도 정말정말 큰 범위지만, 쉽게 이해하자면)를 도성으로 인식할 뿐이지. 그리고 도성의 중심지인 왕궁에 대한 인식도 분명히 갖고 있다.

당장 필자만 봐도, 도성이라는 표현과 왕성이라는 표현을 혼용하는 것이 당연히 왕궁이 있는 중심지를 포함한 지역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수도권의 변경을 도성에 포함시키지도 않고 말이다. 왕궁은 당연히 도성 안에 포함된 개념이며,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어디까지나 '-궁'이기 때문에 아무리 크게 잡아도 건물址(혹은 건물群)일 뿐이다(부여의 관북리 유적이라든가, 익산의 왕궁리 유적을 떠올리면 될 듯 싶다). 그리고 궁 주변으로는 당연히 민가가 자리잡게 마련이다(오히려 이때 왕궁과 민가 사이를 갈라놓는 왕궁 주변의 성벽 및 담장을 왕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고구려 장안성의 성벽으로 나눠진 공간 구성을 한번 떠올려보자). 물론 민가 뿐만 아니라 관청, 사지, 대로, 시장, 병영, 고분군 등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이 이 주변 범위를 성벽이 감싸고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주변을 만약 성벽이 감싸고 있다면 블레이드님 표현대로라면 '왕성'일 것이며, 필자가 생각하는, 그리고 고고학 일반적인 인식대로라면 '도성'으로 흔히 부를 수 있겠다. 단, 성벽으로 감싸고 있지 않다면, 블레이드님식 표현인 왕성이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 없다. 오히려 도성은 될지언정(도성에 대해서는 공간이라고 하셨으니). 그럼 왕성과 도성의 차이가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는데 그건 어떻게 할 것인가? 즉, 왕성과 도성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며, 그래서 왕도라는 말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용어 문제는 다시금 '조율'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블레이드님이 본인의 생각을 계속 관철시키려면 필자에게 고고학적인 사례를 들어 이를 설득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서로의 용어를 쓰면서 의견을 주고 받아야 할 것이다. 단, 단순히 용어가 갖는 단어상의 의미만 갖고 토론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후자의 상황이 올지 모르니, 필자의 용어 정리도 해둬야 할 것 같다.

블레이드의 '왕궁' = W.A의 '왕궁' 혹은 '왕성'(왕궁만 둘러싼 담장이나 성벽이 있을 때)
블레이드의 '왕성' = W.A의 '도성' 혹은 '왕도'(고고학계의 일반적인 견해)
블레이드의 '도성' = W.A의 '경기'(이에 대한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용어는 없다)

뭐 이 정도가 돼지 않을까 싶다.


3. 그렇게 봤을때 필자의 인식에는 한성(서울)이나 공주는 오히려 큰 차이가 없다. 둘 다 똑같은 상황이므로. 예를 들면 왕궁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중심지에 왕궁이 있었을 법한 성은 있다. 하지만 그 성 내에서 민가는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이는 왕성이라고 볼 수는 없다. 주변에 나성도 없어서 왕성 혹은 도성의 범위도 정할 수 없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다만, 부여는 다르다. 관북리유적과 같은 왕궁 관련 유적이 있으며, 주변에서 나성이 확인되었고, 나성이 둘러싸고 있는 도성(블레이드님의 왕성이겠죠?) 내부에서 계획도시의 면모가 고고학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주도 결국 왕궁이 나올만한 공간은 지금 찾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여쭙고 싶은게 있다. 그럼 사비도성(이 용어도 블레이드님은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지만, 일반적으로 고고학계에서 이렇게 부르니 일단 이렇게 적겠습니다)의 경우, 나성이 둘러싼 공간을 블레이드님은 왕성으로 보시는 겁니까? 도성으로 보시는 겁니까? 그게 왕성이라면 어느 범위까지 도성으로 보시는 겁니까?


4. 백제 왕성에 대해서 예법이 존중받는 시대이니 왕궁 건설에 있어 어느 정도 정형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블레이드님 말씀 십분 이해한다. 필자라고 왜 그걸 모르겠는가? 하지만 잘 생각하시길 바란다. 필자는 고고학 전공자이다. 필자가 왜 자꾸 고고학자와 문헌사학자는 다르다, 학문의 접근법이나 방법론에 있어 차이가 있다~고 누누히 얘기하는지 다시 한번 상기하시기 바란다.

<고공기>가 교과서적인 역할을 하는 내용이므로 그걸 근거로 백제 왕성의 기본구조나 규모를 예측한다고 하셨다. 그건 문헌사학자들의 접근법이죠. 철저하게. 필자가 같은 얘기를 하려면 필자는 <고공기>대로 실제로 꾸며진 백제 왕성 실물이 발굴되고 그걸 토대로 해야 한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건설된 왕성이 동시기 고구려나 신라에서라고 확인이 되어야 뭔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 고대사학회장에 같이 계셨으니 알 것이다. 첫번째 발표자인 강인욱 선생님은 고고학자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패널의 '연나라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해 1천여리의 땅을 차지했다는 것은 문헌을 살펴봤을 때 문제가 있다. 왜 그 기존의 인식에 기반해 논지를 전개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고고학적으로 그 시기 유물상 변화가 확인되고, 이를 역사적 사건에 비교해서 그렇게 언급한 것이다. 땅을 차지하고, 아니고, 연의 국력이 어떠하고는 문헌사학자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노코멘트하겠다. 단지 고고자료에 변화가 있었다는 그 사실만은 분명하며, 그렇기 때문에 내 논지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었던 것이다. 물론 추후 필자가 개인적으로 질문을 해서 '진개가 그렇게 많은 영토를 차지했다고 보지는 않는다'라고 했더니 '그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금번 발표에 영향을 끼칠 정도가 아니었으며, 일단 변화상이 확인된다는 것의 근거로 사용했다.'고 한 바 있다. 고고학자와 문헌사학자의 인식 차이를 잘 보여주는 문답이 아니었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분들을 고고학자에게 자꾸 요구하는 것은 마치 고고학자가 문헌사학자에게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럼 다른 지점이 백제 왕성이라는 고고학적인 근거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물론 이때 문헌사학자는 고고학자가 만족할만한, 지극히 고고학적인 시각에서 골라낸 근거를 대야만 할 것이다. 상식적인 것이 아니라).

거기다가, 고고학자에게 일반적으로 당시는 이런 사회였으니, 모두 그러했을 것이다...를 요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건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영역의 문제이니 말이다.

블레이드님은 그 정도의 근거만 갖고도 백제 왕성의 규모나 구조를 예측할 수 있을진 몰라도, 적어도 비전공자이지만 고고학도인 필자가 보기에 그 정도의 근거는 방증의 하나일 뿐이지, 현재의 중론을 뒤집을만한 것은 아니다. 거듭 같은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고고학적인 시선에서 유적과 유물을 대하지 않는다면, 필자가 보기에 그 모든 사람은 비전공자, 아마추어일 뿐이다. 아무리 그 사람이 다른 학문 분야의 권위자이거나 원로라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문헌사학자인 블레이드님이 보기에 필자가 문헌을 갖고 어줍짢게 떠들면 똑같이 인식할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이상이다.

금번 토론에서 용어 정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블레이드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탁견이라 판단하고 싶다.

용어 정리라는 측면에서 양자의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그동안), 그러다보니 이해의 간극을 줄일 수 없었다고 본다.

이제 용어 정리가 이뤄지게 된다면, 보다 생산적인 토론이 진행될 것이라 생각한다.


p.s) 오히려 필자가 부담스러울까봐 글을 짧게 써주신 블레이드님께 긴 글로 돌려드려 죄송하다. 그럼 이만~

덧글

  • 사과향기 2011/06/14 10:39 # 답글

    음 정말 제대로된 토론이란 생각이 듭니다.
    남을 깍아내리고 자신만이 정론이란 식의 주장보다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상대에게 설득할려는 노력이 돋보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6/14 12:36 #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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