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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발견』에 대하여 (3) 전쟁 · 군사

오늘 포스팅을 2개째 쓸 줄이야. 흐음.
저녁먹고 집에 와서 청소하고 빨래 널어놓고, 잠시 쉴 겸 쓰도록 하겠다.
아무래도 이번에 쓸 3번째 글은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듯도 싶고...써봐야 하겠지만.

블레이드님의 글 5번에 대한 트랙백이자, 필자의 3번째 재반론글임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1) 2010년 12월 27일. 근초고왕의 업적 1 by 블레이드님

2) 2010년 12월 27일.
『전쟁의 발견』서평과 나의 짤막한 생각 
by W.A(윗 글의 트랙백)
3) 2010년 12월 27일. 전쟁의 발견에 대한 시비 by 블레이드님(2번 글의 트랙백이자 2번에 대한 1번째 반론글)

4) 2010년 12월 28일.
한반도의 왜가 신라를 침공했다? by 블레이드님(1번 글의 트랙백이자 2번에 대한 2번째 반론글)

5) 2010년 12월 29일. 근초고왕의 업적을 과장했다? by 블레이드님(1번 글의 트랙백이자 2번에 대한 3번째 반론글)

6) 2010년 12월 30일. 광개토왕의 임나가라 정벌 목적이 뭐라고? by 블레이드님(2번에 대한 4번째 반론글)



여기에서는 블레이드님이 필자의 글을 따로 인용하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블레이드님이 쓴 포스팅을 소개하고, 그 다음에 필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식으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 다음 시비거리가 근초고왕의 업적인 것 같다. Warfare Archaeology가 근초고왕 때에 마한을 세력권에 넣었다는 업적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근거는 ‘5세기를 넘어서면서 영산강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서남부 일대에 중앙정부(한성의 백제)와 대등한 규모의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있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무시했으니 실소를 금치 못하겠단다.


여기에서 하나 더 추가하자면, 4세기에 근초고왕이 마한 세력을 전부 백제로 통합했다고 치자. 그런데 그럴만한 고고자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즉, 4세기를 기점으로 백제식 문화요소가 투영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산강 유역의 지방 수장층들이 4세기 이후 5세기를 기점으로 엄청나게 성장세를 달린다는 것이다. 이건 기존에 알려진 상식과 다르다는 점이 필자가 갖는 의문이었다. 그래서『삼국사기』를 살펴봤더니 잉? 근초고왕 시절에 정복전과 관련된 전쟁 기록이 하나도 없네? 특히 마한을 어떻게 했다는 기록은?? 이건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거기다가 5~6세기 영산강 유역에서 득세하는 지방 수장층에 대한 기록 또한 당연히 확인되지 않고. 기본적으로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한낱 고고학을 공부하는 학부생도 알고 있는 사실을 이 책의 저자는 왜 몰랐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뭐 일단은 문헌사학계와 고고학계의 교류가 그만큼 없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인정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전부터 누누이 강조했듯이, 아무 말이나 만들어 내는 데에는 자기 필요한 몇가지 논리만 강조하면 되지만, 이게 헛소리라는 점을 증명하는 데에는 몇배나 되는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러니 여기서 고고학을 이용해 사기치는 수법을 일일이 소개할 수도 없고, 얼마전 고고학을 악용해서 원하는 역사를 만들어내는 사례는 히틀러의 예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했던 포스팅도 올라왔던 바 있으니 여기서는 적접 관련된 부분만 다루기로 한다.


얼마전 올라왔다는(그 당시로서 얼마 전이겠지만) 포스팅이 궁금하다. 그때에도 못 찾아봤는데, 혹시 아시는 분은 얘기를 좀 해 주셨으면 한다.


‘고고학적 근거가 어떻게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지 모르겠다’니 관련된 부분을 한 번 보자. Warfare Archaeology는 한반도 서남부 일대에 백제와 다른 문화를 가진 집단이 5세기까지 있었음이 확인되니 근초고왕 때에 백제가 이 지역을 세력권으로 흡수했다고 보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식의 주장을 폈다. 이런 말을 하는 폼을 보니 역사공부를 주로 고고학을 통해 한 모양이다.

이런 게 바로 유적의 이면에 있는 역사의 보고 싶은 측면만 보는 전형적인 사례다. 그전부터 몇 번 씩이나 강조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고고학은 단지 문화의 흐름만 보여줄 수 있을 뿐이며 문화와 정치의 흐름은 완전히 별개일 수 있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일제시대에도 한국사람은 대부분 기존의 문화를 고수하며 살았다. 해방된 지금 일본과 확실히 구분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점을 보면 굳이 설명을 덧붙일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시대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유적 발굴해놓고 ‘이렇게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기록은 거짓’이라고 하면 무슨 꼴이 될까?


먼저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일제시대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유적을 발굴해놓고 '이렇게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기록은 거짓'이라고 할만한 고고학자는 그 어디에도 없다. 설령 일제시대때 일제가 조선을 강제점령했다는 그 어떤 문헌자료가 단 한줄도 없다 하더라도(왜냐하면 당시 여러 지역의 유적을 파봤을때 일제가 강제로 이입해놓은 문화적 양상이라든가, 총독부 건물같은 것이 버젓이 살아있을테니 말이다). 당연히 블레이드님 얘기대로 윗대가리들의 정치놀음에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는 기물 하나하나가 전부 싹 바뀌거나, 문화양상이 100%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미시적으로 유적을 해석했을 때의 얘기다. 만약 해당 유적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시대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을 알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해당 유적에 대한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 했을때 같은 유적을 놓고 고고학자라면 '일제시대가 되었어도 조선시대 사람들의 문화양상은 변함이 없었으며, 일반 삶에까지 일제의 문화가 강제적으로 이입되지는 않았다.'라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필자라면.

뭐 역사학과 고고학의 학문적 성격과 방법론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제 블레이드님과 서로 합의점이 어느 정도 도출된 상태이니 이 부분은 그만 얘기하도록 하겠다. 다만, 이 글을 볼 다른 일반 블로거들에게 몇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고고학은 아주 폭넓은 시간대를 연구하는 학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주 미시적인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이기도 하다.

굳이 역사학과 비교하자면 역사학은 문헌에 기록된 사건이 일어난 연도와 월일을 통해 그 사건이 전체 시간 중에 어떤 위치에 속해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여기에서 정확이란 말은 사료비판 후 그 사료가 믿을만 하다는 가정 하에 하는 얘기다). 그렇지만 그 사건을 그대로 복원하기는 힘들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모년 모월 모일에 홍수가 나서 김개똥이를 비롯한 서울 도심부의 집 10채가 쓸려갔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자. 그때 역사학자는 그 사건이 일어난 시점을 알고, 그 시기에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인식할 수가 있다. 하지만, 홍수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서울 도심부의 집은 어떤 모양이었는지, 홍수로 쓸려갔다면 어떤 흔적이 남았는지 등은 역사학자가 알 수 없다. 대신 고고학자는 땅 속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그런 부분들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일부 확인된 서울의 주거지 유적을 갖고 전체 주거지의 규모라든가, 인구 규모라든가, 집의 갯수 등을 추론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얘기하는 고고학이 큰 폭의 시간대를 연구하는 학문이기도 하지만, 미시적인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역사학이 전체 한국사라고 하는 긴 도화지 위에 한 점을 찍는 학문이라면, 고고학은 그 점을 입체적인 공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역사적 맥락 상 정확하다고 공인되는 기록이 있다고 했을때 그 기록을 좀 더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 고고학이라는 소리다. 또한 고고자료는 땅 속에서 확인된 실물 자료를 갖고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문헌을 거꾸로 비판해주는, 교차검증이 가능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는 고고자료에 대해 문헌자료가 그런 역할을 해 줄 수도 있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중국측 문헌을 보면 고구려에는 왕궁, 관청, 절에만 기와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관방시설인 홍련봉 1보루를 비롯한 몇몇 성에서도 기와가 나왔다. 이는 분명 문헌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해주는 고고학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이 밥을 먹고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럼 어떤 반찬에 먹었겠는가. 제대로 된 문헌의 기록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고고자료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먹고 살았는지 확인할 수가 있다. 당대 문화사가 고고학을 통해 풍부해지는 것이다.

즉, 문화와 정치의 흐름이 별개일 경우, 고고학자 또한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그에 따라 고고자료를 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라고 해서 블레이드님이 위에서 언급하는 그러한 얘기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나 다 같은 사람이 하는 학문인데, 역사학하는 사람은 그런 것들을 인식할 수 있고, 고고학하는 사람들은 모르고 무턱대고 고고자료를 해석한다~는 것은 조금 지나친 오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상황 속에서 땅 속에서 나온 고고자료에 대한 해석문제를 한번 들춰보자. 제대로 조사된 고고자료라면 출토양상이 있고, 출토시점과 위치 등이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것을 통해 비단 그 유물을 파낸 발굴책임자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훈련이 어느 정도 되어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당 유적 및 유물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해석이 갈리는 것은 그 다음 단계이다. 누구는 이걸 어떻게 보고, 누구는 이걸 어떻게 보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고고학자가 해석 이전의 출토양상 단계에서 고고자료를 훼손 및 왜곡했다면 다른 고고학자가 이를 모를리가 없다. 이는 해석을 달리하는 부분과는 별개의 문제로,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과거 일본의 구석기 날조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건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해석 이전 단계에서 이미 잘못된 부분이었다). 이는 아마 블레이드님이 풍납토성에 대한 책을 쓰고, 그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이런 생각을 고착화한 결과라 생각한다. 하지만 풍납토성 발굴은 한국 고고학 전체로 봤을때 아주 일부에 불과한 발굴일 뿐이다. 거기서 벌어진 모든 고고학적 연구성과가 한국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보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특히 백제 시대에는 앞 시대 문화 박멸시키겠다는 식의 직접 통치를 했던 시대로 아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는 복속되었다 하더라도, 기존의 문화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게 이상할 것이 없다.

인정! 또 인정! 하지만 이는 블레이드님이 고고학에 대해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라 생각한다(물론 비전공자라면 누구나).

이미 여러번 얘기를 해왔었다. 문헌사학과 고고학은 다르다고. 문헌사학자들은 문헌의 몇줄을 갖고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라는 추정을 학문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고고학자는 그렇게 하기가 아주아주 힘들다고. 필자가 이 블로그에 쓴 몇개의 글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군의 관련 글). 고고학자는 눈에 보이는게 없으면 암것도 할 수가 없다. (젠장! 이게 가끔은 엄청 답답할 때가 있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블레이드님의 문화라는 표현은 정확하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고고학적으로 문화라 한다면 과거에는 단순히 물질문화만을 염두에 뒀지만 최근에는 신고고학, 탈과정주의고고학 등의 영향으로 추상적인 부분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인지과정주의 고고학이라는 분야가 대표적인데 개인적으로 추후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이다). 즉, 물질문화가 기본이 돼지만 그것을 토대로 더 포괄적인 범위까지 살펴봐야 한다는 뜻이다(
문화의 개념 참고). 그렇게 봤을때 고고학적으로 해당 국가(정치체)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물질문화로 대표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나오는 토기는 특정 정치체(혹은 국가)와 역사적 맥락을 같이 한다는 특징이 있음이 여러번 입증되었고 논의되었다(토기에 대한 내용은 이 책 참고). 즉, 문헌사학자 혹은 일반인들이 막연하게 '나라가 바뀌었어도 그 주민들은 쓰던 기물을 그대로 썼겠지~'라고 하는 인식은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의하면 '고대 국가에 있어서 아니다!'라고 답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고구려 토기, 신라 토기, 백제 토기 등과 같은 용어가 나오지 못 했겠지. 물론 그 사회적 변혁의 격변기 혹은 문화적 접변이 일어난 시기에 과도기적인 양상이 확인되기는 한다. 하지만 4~5세기 정도가 돼면 국가별로 모든 문화적 요소가 확연하게 구분되고 차이가 나기 때문에 블레이드님의 생각은 틀리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복속되어도 문화적으로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는 그야말로 상식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정치적으로 복속되면, 정치적으로 상위에 있는 집단의 물질문화가 대거 유입되면서 기존의 문화와 혼합되거나(사비기 백제토기 양식을 보면, 한강 일대를 점유했던 고구려의 영향으로 고구려토기 양식이 대거 유입되어 새로운 기종이 나오거나, 기존 백제토기와 모양이 다른 토기들이 대거 확인된다), 새로운 문화가 점점 우세해져 결국 기존의 문화를 완전히 대체하는 상황이 오기도 하며(영산강 유역의 거대한 옹관묘는 이후 석실 안에 옹관을 안치하는 형식으로 바뀌다가 결국 백제식 석실묘로 대체된다), 새로운 문화가 단기간에 기존 문화를 싹 갈아엎고 대체하기도 한다(청동기시대 후기 송국리형문화는 기존 문화와 큰 차이를 보이며 갑자기 등장해 한반도 중남부 각지에 확산된다). 일단 눈에 보이는 변화상이 그렇기 때문에 필자같은 역사고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고고학적 변화 양상을 파악한 다음, 그것을 실제 문헌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과 어떻게 대입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식으로 당대사를 복원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보수적인 문화적 요소인 묘제의 경우...그것도 수장층의 묘제라 한다면...중앙과 비등하거나 더 거대한 묘제가 지방에 나타났다는 의미는 곧 중앙의 힘이 그 지방을 제어하지 못 해서 그 지방의 위세가 급성장했다~로 인식해도 무방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근초고왕이 마한 통합을 했는지 여부를 의심하는 것도 이것과 연결이 돼고 말이다.


물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으로 고고학이 우선이냐 문헌자료가 우선이냐를 따질 필요는 없다. 단지 이 문제에 관한 한 고고학적 증거라는 것은 이렇게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는 반면, 문헌 쪽에 나타나는 문제는 어찌 극복할 지 의문이다.

Warfare Archaeology의 주장대로 백제와 대등한 정치세력이 5세기 넘어까지 존재했다면 수백년에 해당하는 시간동안 이 세력의 활동을 기록한 내용이 하나도 없다시피 할까? 백제와 대등할 정도의 나라라면 당시 동아시아에 미치는 영향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옥저나 동예처럼 별 힘 못써보고 고구려에 흡수된 나라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는데 백제와 대등할 정도의 세력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까지 없다고?

자아! 여기에서 필자와 블레이드님의 접근법이 다름을 여실히 알 수가 있다.

전제조건을 한번 깔아보자.

영산강 유역에 5세기 무렵, 백제 중앙정부와 전혀 다른 문화적 양상을 지닌 거대 고분 및 각종 위신재들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특정 시기에 갑자기 등장해서, 이내 6세기를 기점으로 점점 중앙정부에 흡수되는 양상이 확인된다.

이에 대해 블레이드님은 그런 애들이 있었으면 분명 수백년간 활동한 기록이 있었을텐데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동예나 옥저처럼 힘 한번 못 써본 나라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는데, 백제와 대등할 정도의 세력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라는 식으로 접근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오는 고고자료는 백제 통치하의 지방 세력과 관련해서 해석해야 하지, 그것을 두고 백제의 마한 통합이 어쩌구, 근초고왕이 어쩌구 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정반대로 접근한다. 블레이드님 말씀대로 정말 그런 애들에 대한 기록이 왜 하나도 없을까? 에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필자는 고고자료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문헌사료를 의심할 것이다(이것이 블레이드님과의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고고자료는 당장 눈 앞에 있는 실물자료이자, 당시 사람들이 남긴 1차 사료이다. 하지만 문헌, 그나마『삼국사기』도 1차 사료에 해당하는 금석문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2~3차 사료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1차 사료를 믿고, 2~3차 사료를 의심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왜 문헌에 이런 영산강 세력에 대한 기록이 없는지를 찾아볼 것이다. 그랬더니 이상한 기록들이 나온다. 중국측 기록에서는 백제의 후왕들이 여기저기 싸우고 이기고 책봉을 받는데, 정작 우리측 기록에는 이들에 대한 내용이 없다(삼국사기에도 딱 한군데 나오긴 한다. 북위와의 전쟁 기사 한개가!). 그러고 앞에까지 살펴봤더니 더 이상한 내용이 나온다.『삼국사기』본기를 싹 보니깐 고구려의 경우, 블레이드님 얘기처럼 옥저나 동예를 비롯해 행인국, 비류국 등 국초에 고구려에 정복당한 수많은 소국들이 열거되어 있다. 또한, 신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주변의 소국들이 통합되는 과정 및 바로 옆에 붙은 가야와 왜(바다 건너에 있든, 바다 안 건너에 있든 ^^)와 끊임없이 상쟁하는 기록이 나오며 결국 가야는 신라에 통합 혹은 복속되는 과정도 나온다. 그런데 이상하게 백제만 아무것도 없다. 백제가 국초에 통합한 소국은 다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오히려 고고자료상으로 보나 중국측 사료로 보나 주변에 통합할 소국이 가장 많은 나라는 바로 백제였고, 그런 면에서 가장 유리했을텐데 말이다.

이상의 방법을 통해서 필자는 한국 고대사를 다른 이들과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이는 같은 고고학을 전공하는 선후배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는 국가 체제가 달랐고, 이는 태생에서부터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중앙 정부의 중심지, 즉 도성에서 가장 큰 고분이 나와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는 고구려와 신라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런데 백제는 정반대다. 연기 송원리에서 확인된 지하식 석실은 지금껏 확인된 백제 고분 중 최대이며, 그러한 구조 또한 독창적이다. 천안과 청주, 공주, 연기, 영산강 유역 등 각지에서 중앙 정부와 다른 유적과 유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가야와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가야는 뚜렷하게 강력한 구심점도 딱히 없다. 다 거기서 거기이고, 고만고만하다. 하지만 분명 백제는 중앙이라고 볼만한 구심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도 그에 준하는 구심점이 또 나온다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솔직히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는 많이 공부하지를 못 했다. 백제 전공자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원삼국시대~백제시대로 이어지는 기간에 해당하는 고고자료가 가장 지역성이 뚜렷하며, 가장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백제의 담로제도와 연결하여, 백제의 지방통치체제가 지방분권적인 후왕제로 오래도록 유지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단, 이것이 백제가 고구려, 신라보다 정치적으로 뒤떨어지고 국력이 약했다고 보는 증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냥 현재 고고자료와 필자가 검토한 문헌사료를 봤을때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백제는 고구려와 같은 제국체제(Empire-System)를 갖춘 나라와 비등한 정도의 국력을 갖췄음이 확인되었고 말이다. 즉, 고대 국가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좀 다양성을 갖고 보자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지금 고구려의 제국체제와 관련하여 기존과는 다르게 고구려 보루 및 한반도 중남부에서 나오는 고구려 유적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논고를 준비 중이다. 조만간 여기에도 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필자의 백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예전에 두막루님과 토론한 이 글을 참고하면 좋을 듯 싶다(
클릭& 클릭)


임영진 교수 같은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는 모양인데, 이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고고학계가 안팎으로 욕을 먹는다는 사실은 알고 싶지도 않은가 보다. 그런데도 이런 걸 근거랍시고 내세워놓고 ‘풋~진짜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단다.

끝으로 ‘솔직히 난 근초고왕이 위대한 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백제사 초기의 정복군주라는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부분도 문제다. 근초고왕이라는 인물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는 자기 마음대로일지 모르지만, 역사는 문학이 아니다. 근초고왕의 업적에는 단순히 왕의 체면만 걸린 게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역사의 전체 흐름을 보는 시각이 걸려 있다. 이런 문제를 뭘 제대로 모르는 사람의 개인적 의견에 의지할 수 없다. 그래서 최대한 근거와 논리를 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영진 쌤은 문헌사학계에서는 그런 평가를 받는지 몰라도 고고학계에서는 적지 않은 연구성과를 내놓고 있는 분이며, 필자 또한 종종 그 연구성과에서 도움을 얻는 바 있다. 뭐 블레이드님이 임영진 쌤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자유이겠으나, 그로 인해 한국 고고학계가 안팎으로 욕을 먹는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문헌사학계에서는 그러는가 몰라도 말이다.

그리고 저 위의 발언은 근초고왕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에서 그친 발언은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근초고왕의 업적은 우리가 그렇게 무시하고 까대는『일본서기』의 기록이 주요 근거이지 않은가?『삼국사기』에 적힌 근초고왕의 업적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자.

즉위 2년째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고, 진정이라는 조정 좌평때문에 근초고왕이 곤혹을 치룬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고 뜬금없다가 21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2년 있다가 또 보낸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고국원태왕과 치양에서 싸워 이기고,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한다. 이후 재위 26년째에는 태자 근구수와 함께 평양을 공격해 고국원태왕을 죽인 다음, 한산으로 천도한다. 이후 남조의 진나라와 사신 교환을 몇번 하고, 청목령에 성을 쌓고, 고구려가 함락한 수곡성을 뺏으려 하나 뺏지 못 한다. 그리고 박사 고흥이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백제사 최초의 정사인『서기』를 썼다는 기록만 나온다.

일단 문헌에 나온 전부가 이것이다. 여기에 마한이 낄 자리는 없고, 정복전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사료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문헌을 잘 이해한다 하더라도 없는 것을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 다시『일본서기』로 돌아가보자. 신공황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2주갑 인상설에 따라 근초고왕 시절 백제가 주축이 되어 왜까지 동원된 군사력이 마한 문화권을 정벌했다는 해석을 한다(물론 사료 비판을 통해 일본이 주축이 되었다는 얘기는 백제로 바꾸고). 정확하게 기술된『삼국사기』의 기록도 아니도, 기년 조정이 어느 정도 이뤄진『일본서기』에 따라야만, 근초고왕은 마한을 싹 다 통합하고, 새로 역사서를 편찬하고, 고구려 왕까지 죽인 위대한 정복군주가 된다. 하지만 그 근거는 달랑『일본서기』하나다.『삼국사기』에 왜 이런 기록이 없는지 필자는 당최 이해가 안 간다. 이는 문헌사학에 정통한 블레이드님과 이 블로그의 수많은 문헌사학 관련 전문 블로거들께서 답을 해주시리라 믿는다. 암튼,『삼국사기』에도 근거가 없고, 고고자료 상으로도 그런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생활 전반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영산강 유역이 백제에 통합되었을때 나타나는 그런 현상과 같은 현상이 4세기 호남 지방에서도 나타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상식적으로 살펴봐도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근초고왕이 마한 지방을 통합했다고 하자! 그런데 문제는 5세기 무렵에 갑자기 영산강 유역의 지방 수장층들이 대거 득세한다는 사실이다. 비단 영산강 유역뿐만이 아니고. 백제 각지가 전국시대마냥 지방 수장층들이 서로 자기 세를 과시한다(그 과시한 세는 그대로 거대한 고분으로 반영되었고). 근초고왕이 통합했던 지역이 다시 이렇게 분열된 것은 또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리고 이러한 고고학적으로 분명히 확인되는 사실이 어째서 문헌에는 전혀 기록되지도 않았는가?

그렇기 때문에...필자는 '마한 지역의 통합과 마한 지역의 독립'이 문헌상 전혀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백제는 그 지역을 처음부터 차지했던 것처럼『삼국사기』에 그렇게 기록된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확실하게 나오는 고고자료를 무시하면서까지 그 견해를 신뢰해야할 또 다른 확실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으니...필자가 이런 의문을 품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근초고왕이 원대한 식견이 있는 군주로 표현된만큼,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는 것에는 필자도 동의한다. 고구려왕을 죽일 정도의 성과를 올리는 인물이라면 군사적 재능도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마한을 다 통합하고, 왜에 칠지도를 전해주고, 왜 열도와 산동반도에 백제의 군현을 설치할 정도로 대단한 정복군주는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마한을 다 통합했다는 것만 쳐도 그렇다.

이상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쓰는 자잘한 생활 기물까지 정치적 변혁에 맞춰 움직일 필요는 없다. 그런 양상은 확인되기도 하고, 확인 안 되기도 하니깐. 하지만 적어도 최고 지배계층(소위 로열 패밀리)이 영위하는 문화적 요소(거대한 고분이라든가, 수많은 위신재라든가, 권력을 상징하는 여러 기물)들은 정치적인 변혁과 함께 움직이는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덧글

  • 행인1 2011/06/15 23:14 # 답글

    뭐, '그분'맘에 안들면 다 '똥파리'고 '욕 먹는 사람'이니까요. 그나저나 그분이 '식민고고학' 타령 하실 타이밍이 슬슬되어가는데...
  • Warfare Archaeology 2011/06/16 00:35 #

    ㅋ 이렇게까지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그러실까요 설마? ^^
  • 저기요. 2011/06/16 05:36 # 삭제

    두 분의 토론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입장인데, 이 토론에서 불필요한 말들 하면서 토론 초치는 소리 그만 합시다. 이 토론은 한국전과는 분명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이런 것을 전혀 파악 못 하시는 것 같군요.

    이 블로그 주인장이 난독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말했으면 알아들었을 것이고 또 주인장이 괜찮다는데 굳이 두 번 씩이나 비슷한 말을 할 이유가 없는 것 같군요. 실례지만 지켜보는 입장으로서는 노파심이 아니라 그냥 토론 방해하려는 이간질 행위로 밖에 안 보입니다
    적당히 합시다? ^^
  • Warfare Archaeology 2011/06/16 09:06 #

    저기요님 마음 이해합니다. ^^

    아마 행인1님도 더는 안 그러실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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