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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발견』에 대하여 (4) 전쟁 · 군사

마지막 글이다.

지금 내가 이걸 쓰고 있을 시간이 아닌데...그냥 쓰는 김에 다 쓰도록 하겠다.
이에 대한 블레이드님의 트랙백은 그 다음에 처리하기로 하고(아마 트랙백 분명 다시 하실테니).

아! 참고로 이번 글은 6번 글에 해당하는 트랙백이다. 참고하시길.

이 역시 블레이드님의 원문(파란색)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하겠다(따옴표 이하 부분).
 

1) 2010년 12월 27일. 근초고왕의 업적 1 by 블레이드님

2) 2010년 12월 27일.
『전쟁의 발견』서평과 나의 짤막한 생각 
by W.A(윗 글의 트랙백)
3) 2010년 12월 27일. 전쟁의 발견에 대한 시비 by 블레이드님(2번 글의 트랙백이자 2번에 대한 1번째 반론글)

4) 2010년 12월 28일.
한반도의 왜가 신라를 침공했다? by 블레이드님(1번 글의 트랙백이자 2번에 대한 2번째 반론글)

5) 2010년 12월 29일. 근초고왕의 업적을 과장했다?by 블레이드님(1번 글의 트랙백이자 2번에 대한 3번째 반론글)

6) 2010년 12월 30일. 광개토왕의 임나가라 정벌 목적이 뭐라고? by 블레이드님(2번에 대한 4번째 반론글)


 

근초고왕이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면,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는 단연 광개토왕이 꼽힌다. 광개토왕의 업적 중에서 임나가라 정벌은 당시 국제관계를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준다. 그래서 중요하게 다루어 보았었다.

그런데 Warfare Archaeology의 이 부분 평가는 내용 왜곡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왜,『삼국사기』에 나오는 왜, 광개토호태왕비에 나오는 왜를 모두 다 동일한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에 내용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주장은 이전의 내용을 계속 고집하는 수준이라 더 상대할 가치가 없겠다.

그러나 ‘왜를 초토화시키기 위해서 5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했고, 그로 인해 심리적인 전략적 효과를 얻었다는 비상식적인 언급을 하고 있었다’라는 부분은 도대체 뭔가? 책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비교를 위해 원래 내용을 요약해 보자. 4세기 후반부터 왜가 임나가라와 협력하여 신라를 괴롭히자, 신라가 받는 압력은 바다 쪽에서 침공해올 때와 비교가 안되게 커졌다. 그렇다고 신라가 단독으로 임나가라를 공격하자니 백제-가야-왜가 맺어지는 동맹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했고, 광개토왕이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고구려 역시 사방에 적을 두고 있는 상황에서 병력을 임나가라 방면에만 묶어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단순히 왜만 상대하는 데에는 굳이 5만이나 되는 병력이 필요없었겠지만, 백제를 비롯한 다른 강적이 개입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필자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책의 원문을 살펴보자(121~122쪽).

고구려는 무엇 때문에 5만이나 되는 대병력을 동원했을까? 병력을 많이 동원하면 그만큼 비용이 추가되게 마련이다. 소수의 병력으로도 제압 가능한 상대에게 맞서면서 쓸데없이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 건 낭비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개토왕은 5만의 대병력을 동원했다. 광개토왕 정도의 전략가가 아무 생각 없이 상당한 출혈을 각오하면서까지 병력 동원을 강행했을 리는 없다. 다양한 요소를 고려한 포석에서 광개토왕의 의도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일종의 심리전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전쟁 심리상 상대가 조금 우위에 있는 정도라면 약간 불리하더라도 방어측이 가지는 여러 이점을 이용하여 버텨보고자 하는 심리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압도적인 상대를 대할 때는 상황이 다르다. 공연히 버텼다가 약이 오른 상대에게 당하지 않아도 되는 피해를 볼지 모른다.

이런 심리적 차이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우선 작전 시간부터 문제가 된다. 상대가 일단 버티기 시작하면 그 저항을 무너뜨리기까지 시간을 기약할 수 없다. 반면 기가 질린 상대가 바로 항복하면 시간이 걸릴 일이 없다. 희생도 무시할 수 없다. 상대가 저항하면 그 저항을 쳐부수기 위해서도 최소한의 희생을 치러야 한다. 무저항 상태의 항복은 바로 이런 희생까지도 막을 수 있다.

(그레나다 관련 이야기 나오고 - 블레이드님이 아래 언급한)

광개토왕이 노린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 한반도에서의 공성전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공성전은 고구려로서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고구려는 남방의 백제뿐 아니라 북방에도 연나라도 염두에 둬야 했다. 사방에 적을 두고 있는 고구려군이 신라 · 가야 지역에서 하염없이 시간과 전력을 소모하면서 병력을 묶어두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는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고구려군의 목표는 당연히 속전속결이었다. 그러려면 애초부터 저항할 꿈도 못 꿀 정도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압박하는 것이 상책이다. 결과적으로도 별 저항을 하지 않고 단시간에 정벌사업을 완료했다.

대병력 동원 작전은 신라를 비롯한 주변 국가에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는 효과도 발휘했다. 임나가라를 포함한 가야 세력은 감히 고구려에 저항할 생각도 못 했다. 백제도 개입할 기회조차 잡지 못 했다. 전략의 효과는 이렇게 분명했다. 대병력을 동원한 덕분에 고구려는 속전속결과, 임나가라를 뒤탈없이 정리한다는 두 가지 전략 목표를 손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 부분을 읽고 필자가 느끼기에 블레이드님이 당시 전쟁을 두고 심리전 측면을 중시한다고 여겼다. 임나가라에게도 심리적으로 압박을 주어 처음부터 찍소리 못 하고 항복하게 만들었고, 신라에게도 심리적으로 압박을 줘서 역시 고구려는 무서워라는 결과를 낳게 했으며, 역시 백제에게도 심리적으로 압박을 줘서 너네가 적당한 병력으로 덤빌만큼 고구려는 만만치 않다~라는 메세지를 남겼다는 식으로 필자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실질적으로 싸우지 않고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렇게 대병을 동원했다~고 이해했으니까.

당시 전쟁에 대해 필자는 광개토태왕이 왜 그 시점에(북방의 연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하물며 광개토태왕 9년=영락 10년(400) 2월에 모용희가 신성과 남소성을 비롯한 7백리의 땅을 차지한 그 시점에!) 고구려가 북방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쪽의 왜를 공격했던 것일까? 에 더 중점을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된다면 단순히 고구려가 왜를 공격하기 위해서 거기까지 내려갔다는 설정 자체가 필자가 보기에는 비합리적인 소리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4세기 말~5세기 초 일본 열도의 군사력이 고구려가 5만이나 대병을 동원해 신경써야 할 정도였다고 보지는 않으니깐 말이다. 물론 앞서 주욱 썼던 포스팅에 나온 것처럼, 이 왜를 필자는 바다 건너 있던 정치체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블레이드님은 이 왜를 바다 건너에 자리잡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필자는 전쟁의 主攻이 여기에 적힌 것처럼 '백제'가 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100쪽에서 블레이드님이 '당시 동아시아의 양대 축이 고구려와 백제'라고 했던 머리말(?)과도 어울렸으며, 131쪽에 나오는데로 '고구려의 신속한 작전 덕분에 한반도 남부에서 왜까지 걸쳐있던 反 고구려 세력권이 붕괴되었다. 그 핵심 요소는 가야 세력의 이탈이라 할 수 있다.'와도 맞물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백제가 반 고구려 동맹권의 주축이었으며, 백제와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에 있던 가야 문화권 세력이 신라를 공격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왜는 비문이 작성된 시점의 고구려인들이 인식했던 일본 열도의 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400년 당시 광개토태왕의 고구려군과 한반도에서 싸웠던 군대가 일본 열도의 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필자가 블레이드님께 '이 책의 저자는 왜라는 정치체를 다 동일하게 생각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서술한 것 같다~'라고 쓴 것이다.

그럼 정리해보자.

필자는 비문에 적힌 '왜'를,『삼국사기』에도 '왜'로 볼만한 정치체가 2개 정도 있다고 했던 것처럼 단순히 일본 열도의 정치체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비문 전체적으로 보면 이 '왜'는 상당히 강력한 존재로서 고구려가 반드시 격파해야 할 녀석처럼 묘사되어 있다(블레이드님은 131쪽에서 백제가 표면에만 드러나고 별 역할을 못 해서 왜가 과대 포장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진다면 오히려 한반도 내에 터전을 갖고, 왜를 지원해주던 임나가라에 대한 묘사도 있어야만 했는데, 오히려 고구려는 임나가라보다 왜를 더 主敵으로 인식하는 듯한 분위기다). 마치『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주적이 가야나 백제가 아닌, '왜'로 기록된 녀석인 것처럼 말이다. 흔히들 4세기 고훈시대가 발생하는데 있어 한반도 도래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필자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봤을때 고구려 입장에서는 고훈시대를 주도한 도래인 집단을 왜라고 불렀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주력이 백제라고 했을 때 고구려 입장에서는 일본으로 건너가기 이전은 백제였지만, 건너간 이후에는 왜로 본 것이 아니었을까? 百殘이나 殘國이니 하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도, 한반도에서 백제의 주력이 빠져나간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그렇게 본다면 당대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백제를 <비문>이 다른 식으로 표기하고 있었고, 그런 왜를 고구려가 어떻게든 거꾸러 트릴려고 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필자는 비문에 적힌 '왜'라는 용어를 두고 굳이 조작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는 어디까지나 비문에 나오는 문헌을 해석하는 문제이므로, 이는 블레이드님이 필자보다 더 잘 하실 것이다. 다만, 해석된 번역문을 보고, 당시 비문이 만들어진 시점, 고고학적으로 한반도 서남부에서 지방 세력이 득세하기 시작한 시점, 일본에서 고훈시대라고 하는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문화가 등장한 시점 등이 맞물리는 것에 착안해 필자가 내린 대강의 그림일 뿐이다.

즉, 그런 의미에서 '왜'를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가 북방의 연이 영토를 잠식하는데도 불구하고 남쪽으로 대병을 보냈다고 한다면 이해가 가겠다. 하지만 단순히 일본 열도의 왜가 임나가라와 결탁해 신라를 압박하고, 그 뒤에서 백제가 숨어서 이를 조종했다는 것만으로 고구려가 당장의 위험을 안고 바다 건너 온 왜를 까러 가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별것 아닌 왜를 계속 언급한 것이나 전쟁에 있어 심리적 측면을 강조한 듯한 블레이드님의 표현이 거슬렸던 것일테고.

 블레이드님은 4세기 후반의 짧은 시기에 왜가 기존과는 다른 전략을 썼기 때문에 신라가 독자적으로 이를 물리치지 못 하고 고구려에 손을 빌렸다고 적고 있다. 그건 임나가라와 왜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물론 왜가 가야에 전진기지를 두었을 정도로 가야에 영향력을 끼친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95~98쪽). 전체적으로 필자 역시 동의하나, 딱 4세기 후반에만 일본 열도의 왜가 그런 전략을 썼을까에는 의문이 든다. 이는 앞서 필자가 앞서 썼던 포스팅을 참고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 여쭙고 싶다. 이 왜와 손잡은 임나가라가 대체 언제 정치체로 발돋움했다고 보는 것인지? 필자는 앞서 신라가 인식한 '왜'가 1개 이상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또 하나의 왜가 임나가라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그 중심지는 부산의 복천동 고분군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신라와 가까운 가야 문화권 내에『삼국사기』에 혼동되어 적혀 있는 '왜'가 또 하나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이고. 물론 어디까지나 학계 중론이 아니라 필자 개인적인 생각이다. ^^

이에 대해 블레이드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임나가라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길래 왜는 4세기 후반, 그들과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 이 임나가라라는 정치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만약 임나가라가 4세기 후반 갑자기 성장한 정치체라면 뭐 할 말이 없지만,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면 비단 4세기 이전에도 이때와 마찬가지로 왜와 협력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였을까 싶다.

 

 

이 역학을 설명하느라 얼마 되지도 않는 병력밖에 없던 그레나다를 침공할 때 미국이 10만의 병력을 동원했던 사례까지 들었다. 그런데도 이 내용을 ‘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백제가 버티고 있는 판에 5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해 심리적인 전략적 우위에 서기 위해 고구려가 대군을 동원했다’고 바꿔놓고 이 ‘자체가 어불성설인 셈이다’라고 해놓았다.

근데 블레이드님께 궁금한게 있다.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이라면 1983년도 작전을 언급하는 것 같은데...10만이라니(책에는 수십만이라고 적혀 있고). 어디에서 이런 자료를 찾아보신 것인지 궁금하다. 알려주시면 필자도 필히 확인하겠다.

인터넷에 가볍게 검색해보니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에 대해서 대체로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동아닷컴 관련 기사, 위키백과, 그리고 통일한국 잡지(최상현, 1983,「그레나다 상륙작전」『통일한국』제1권 2호, 평화문제연구소, p.94~95)에서도(옆의 첨부 파일 확인 요망). war.pdf  거기에서는 한결같이 당시 미국의 투입병력은 2천명이라고 적고 있다(물론 투입된 부대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내용을 싣고 있지만). 이에 대해 R. Ernest Dupuy · Trevor N. Dupuy(허중권 역), 2009,『세계 군사사 사전』, 학연문화사, pp.1689~1690의 내용을 옮기면 앞선 내용보다 자세하면서도, 약간 다른 내용을 알 수 있다.
 

1979년 3월 13일 - 쿠테타

모리스 주교가 권력을 장악하고, 카리브섬에 사회주의 독재 정부를 수립했는데, 이곳은 1973년 2월 7일 영국에 의해 독립이 허용된 지역이었다. 주교는 쿠바 및 소련과의 유대 관계를 강화했다. 2마일 길이의 활주로를 가진 새로운 공항이 관광을 촉진하고 한편 군용기를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서되기 시작했다. 쿠바군과 건설 인부들 및 소련 고문단이 섬에 도착했다.

1983년 10월 10~19일 - 쿠테타

주교는 공산 동료들로부터 소련에서 미국으로 동맹 관계를 전환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권력을 장악한 국방차관 버나드 코아드에 의해 체포되었다. 지지자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석방되었으나, 10월 19일 그와 추종자들 다수는 새로운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혼란이 이 섬을 휩쓸었다.

1983년 10월 23일 - 카리브 국가들의 미국의 지원 호소

섬에서의 혼란 상태를 언급하면서, 그리고 신체제가 모든 인접 카리브해 국가들의 전투력보다 더 강한 군사력을 통제하자 동카리브해 국가들(자마이카, 도미니카, 트리니다드, 바베도이스, 토바고 및 벨리즈를 포함한)이 공식적으로 그라나다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미국이 군사적으로 그라나다를 간섭해줄 것을 요구했다. 미국 정부는 대부분 의학생들인 미국인 약 1,000명의 안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레이건 대통령이 국방성에 개입을 지시했다.

1983년 10월 25~30일 - 그라나다 침공

급하게 계획된 "긴급 분노" 작전이 실시되어 약 6,000명의 미군(해병대, 육군 레인저 부대 및 제82공정 사단의 부대들) 및 인접 카리브해 국가들에서 파견된 형태뿐인 부대(약 500명)가 그라나다에 상륙했다. 섬을 방어하는 군대는 정확히 1,000명의 그라나다군과 약 600명의 쿠바 전투 공병이었다. 미군은 상륙 작전 및 공수 작전을 통해 3곳의 해안에 진입했다. 그라나다군의 저항은 하찮고 무시할 만했으나, 쿠바군은 치열하게 전투했다. 미군이 60시간 만에 섬을 장악했다. 미군의 사상자는 전사 18명, 부상 83명이었고, 방어군의 피해는 전사 36명, 부상 66명, 포로 655명이었다. 미군의 이 작전에 대한 비난 보도가 이어졌다.



이상이다. 자료에 차이가 있는데 이는 블레이드님이 해명해주실 것으로 믿는다.

미국도 레이건 당시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수십만 혹은 10만의 대병력을 그레나다에 투입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정도 병력이면 섬을 다 뒤엎고도 말텐데. 이후 미국은 20개월에 걸쳐 그 섬에 괴뢰정부를 세우고, 안정화가 이뤄지자 철수했다고 한다. 그렇게 봤을때 이를 과연 고구려가 5만 대병을 이끌고 한반도 남쪽 끝까지 진격한 작전과 비교할 수 있을까 싶다. 물론 저 당시 6,000명의 병력이 투입된 것도 베트남전 이후 최대 규모라고 하니,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또한 현대전을 고대 전쟁과 비교하는 데에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일단 블레이드님이 예를 드셨으니.

그레나다 침공 당시 미국은 소련과 쿠바 등 공산권 국가들의 영향력 확대가 바로 미국의 턱밑까지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의도에서 이뤄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확실하게 실력으로 그레나다를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소련의 개입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를 경자대원정(400년에 벌어진 전쟁을 필자는 이렇게 표현한다)과 비교한다면, 고구려 또한 백제가 주축이 된 反 고구려 동맹 혹은 백제 문화권의 확대를 우려했을 가능성이 높다(이는 블레이드님과 필자의 생각이 동일하다). 그 과정에서 가야 문화권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열도의 왜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신라를 끊임없이 압박해 왔었고 그간 잘 버텨왔던 신라는 적대 세력에 백제까지 가세하자 더 버티지 못 하고 고구려의 손을 빌린 것으로 판단된다.

블레이드님은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왜의 전략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신라가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다고 보지만 필자는 그저 신라가 이 시기에 국력에 한계가 왔다고 생각한다(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왜라는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서로간의 생각을 굳이 맞출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암튼 그러한 상황에서 고구려는 백제의 성장을 억제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는 당장의 위협인 북방의 후연 문제만큼이나 중요했기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왜가 오합지졸의 어설픈 병력뿐이었고, 고구려군이 대병을 동원했다는 얘기만으로도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어 제대로 전투를 벌이지 못 하고, 그 공황상태가 임나가라까지 전파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그 정도로 허약한 상대였다면, 과연 5만까지 동원했을까 싶다. 이는 그만큼 고구려가 상대해야 하는 적군의 전력이 상당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당연히 바다 건너에 있는 왜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싶다.

이미 <비문>과『삼국사기』에 나온 것처럼 광개토태왕은 여러차례 백제를 공격했고, 패배한 백제의 잔당은 훗날 일본 열도로 넘어가 고훈시대를 도래하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연장선상에서 고구려는 신라 지역과 가야 문화권에 있던 백제계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고, 그것이 경자대원정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한다. 실제 이 전쟁에서 백제계 세력이 대거 패배함으로써 신라가 흥기하고, 가야 문화권이 쇠퇴하게 된 것은 자명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실제 고고자료 또한 이 시기에 가야 문화권 내의 고고자료가 변화상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5세기 초를 기점으로 신라계 장신구(관이나 귀걸이, 허리띠 장식 등)가 부산은 물론이고, 창녕, 성주, 선산 등지에서도 확인되기 시작한다(이한상, 1995,「5~6세기 신라의 변경지배방식」『한국사론』33,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p.63). 이는 신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가야 문화권 각지로 확대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신라의 경주를 제외하고 각지에서 고총으로 볼 수 있는 거대한 고분군들이 조성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5세기 2/4분기 어간으로 많이 이해하고 있다. 고령 지산동 35호분과 같은 녀석이 이때 조성된 것으로 이해된다(조영현, 2007,「가야의 묘제에 나타난 전환기적 특징과 양상-출현기 고총의 축조구조를 중심으로-」『가야와 그 전환기의 고분문화』,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pp.116~123). 이 시기의 상황을 필자는 백제계 중심부가 타격받은 후 5세기 영산강 유역에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김해를 중심으로 성장하던 가야 문화권이 이 시기 붕괴됨으로써 각지에서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등이 흥기하는 것처럼, 백제 중심부가 고구려에게 타격받은 이후 영산강 유역의 거대한 옹관묘를 조성할 능력이 되는 각지의 정치체가 흥기한 것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전기Ⅰ기(2세기)까지는 회백색연질토기가 만들어지다가, 전기Ⅱ기(3세기)가 되면 회청색경질토기로 생산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보다 많은 토기 기종들이 확인되기 시작한다. 더불어 김해 양동리 235호분과 대성동 29호분과 같은 대형고분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 울산 하대 목곽묘의 경우, 양동리와 비교했을 때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에 묘제와 유물 출토 양상으로 봤을 때 당시 김해와 울산은 동일한 문화권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더불어 중기(3세기 말~4세기 말)에 이르게 되면 김해 지역뿐만 아니라 부산 복천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도 주목되는데, 이 역시 토기를 기준으로 봤을때 김해 문화권과 동일성이 지적된다. 그리고 이 시기가 되면 함안토기 분포권이 김해토기 분포권보다 넓어져 대가야가 점차 강국으로 도약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러던 것이 후기(5세기 초엽~6세기 중엽)에 이르게 되면 김해 지역은 급속하게 쇠퇴하는 대신, 창녕, 함안, 합천, 고령 지역의 고분 문화가 눈에 띄게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신라와 가까웠던 창녕, 합천 등은 곧 쇠퇴하고 곧 신라와 먼 지역에 있던 고령, 고성 등지의 세력이 성장세에 이르게 된다(박광춘, 2006,『새롭게 보는 가야고고학』, 학연문화사, pp.321~331). 즉, 이 시기에 신라가 가야 문화권의 각 세력을 흡수하게 된 것으로 필자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 동인으로는 당연히 400년에 벌어진 경자대원정으로 꼽고 싶고. 이로서 고구려는 본래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고, 이 와중에 일본 열도에 있는 정치체, 일반적으로 왜라고 부르는 녀석이 끼어들 자리는 오히려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당시의 고고자료를 먼저 파악하고, 어울리는 역사적 상황이 없을까? 하는 마음에 필자가 내놓은 가설일 뿐이다. 그리고 필자가 치밀하게 공부한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분명 부족한 부분도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현재까지 필자가 갖고 있는 지식 수준에서는 이런 큰 그림을 대강 그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좀 긴 글을 적어봤다.



어떻게 해석하면 이렇게까지 해괴하게 내용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남에게 점수를 매기기보다 자신의 언어능력부터 되돌아보는 게 우선인 것 같다.

기본적으로 필자의 생각은 기존의 역사학계가 갖고 있는 생각 혹은 고고학계가 갖고 있는 생각과 많이 다른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인식에 기반하여 이렇다 저렇다 자세히 서술하지 않은 채 블레이드님의 책에 대해 평가했으니 해괴하다고 느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필자의 생각을 정리했으니, 그에 대해 블레이드님이 단순히 저렇게 평가하고 넘어가시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그럼 이만.

밀린 일들이 있어서, 아마 이 글들에 대한 트랙백은 추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그래도 이해를 해주시길...


덧글

  • 슈타인호프 2011/06/16 01:18 # 답글

    고대사는 모르겠고...그레나다 침공 당시 직접 동원된 미군 전력은 저도 6천명 가량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건 지상병력만이니, 작전을 지원하는데 투입된 해군과 공군 전력을 포함하면 더 늘어나겠죠. 일단 항공모함 한 척의 승무원만 해도 천 단위로 세어야 하니까요.

    근데 그래도 10만은 너무한 수치가 아닌가 합니다. 그 당시 그레나다 인구가 11만 가량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죠;;
  • Warfare Archaeology 2011/06/16 01:21 #

    네. 저도 그렇게 알고 있는데...

    책에는 10만이 아니라 수십만으로 적혀 있다능...-.-;

    암튼 지원병력은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흐음. 그래도 10만까지 갈까요?? 쩝...
  • 넴가1021 2011/06/16 01:52 # 삭제 답글

    본토에서 동원 된 대기 상태의 병력 자체는 10만이 가능할수도 있다고 조심 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주변 사람들 경우에서 보면 이라크나 아프간때 그렇게 동원된 다음에 훈련뒤 순차적으로 파견 나가는거 같더라구요..
  • Warfare Archaeology 2011/06/16 02:45 #

    흐음~블레이드님이 그걸 염두에 두고 10만 혹은 수십만이라는 표현을 쓰셨다면야 저도 부인할 생각은 없지만...

    일단 어떤 의미로 쓰셨는지, 그리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여기에서 병력의 규모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거든요. 저 병력이 많지 않다면 블레이드님이 굳이 그 챕터에서 저 사례를 예시로 들 필요가 없었으니깐요. ^^
  • Ya펭귄 2011/06/16 11:51 #

    그레나다를 수비하는 병력들에 대해서 대병력을 들이밀어 심리적으로 압도할 목적이었다는 이야기가 성립한다면 어차피 본토 주둔 대기병력의 숫자는 별반 의미가 없지요...

  • Warfare Archaeology 2011/06/16 15:01 #

    저도 일단은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저자인 블레이드님이 직접 얘기하시기 전에는 굳이 저희끼리 무리하게 추론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책을 직접 쓴 사람과 직접 읽은 사람 사이에서도 분명 시각차는 존재할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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