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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발견』에 대하여 (2) - 3 전쟁 · 군사

포상팔국의 실체 by 블레이드님


1. 포상팔국 관련 내용

아~그랬구나~ 고고학계에서도 딱히 필자와 같은 생각은 보편적이지 않다. 문헌사학계쪽 입장은 잘 몰랐는데. ^^

하지만 어디까지나 필자 개인적인 생각이니(블레이드님보다 부담이 없다는 의미이다. ^^), 일단 더 적어보겠다.

고고학계에서는 일단 전기가야니, 후기가야니 하는 김태식 쌤의 입장에 대해서 부정적인 경향이 있다. 전기가야의 맹주인 금관가야, 후기가야의 맹주인 대가야하는 식으로들 많이 이야기를 하고, 중박에도 그러한 패널이 붙어있는데, 딱 고고자료 상으로 보면 가야 문화권 내에서(전기든, 후기든) 뭔가 중앙이라고 볼 수 있는 뚜렷한 위계 차이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성백제에 지방에서 거대한 수장층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한성백제가 중앙부에 해당하는 정치체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습니다(만약 연기군 송원리에서 현재까지 파악된 최대 규모의 백제 고분이 나왔다 하더라도, 한강 유역(백제의 경기 지방)에서 확인되는 백제 유물조합상과 유적을 넘어서는 권위를 갖지는 않으니깐). 즉, 이는 현재의 연구자들이 임의로 구분한 것이지, 당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필자 또한 과거에는 김태식 쌤의 견해를 수용했으나, 고고자료상 맹주라고 볼만한 지위를 갖춘 정치체의 존재를 쉽게 찾지 못 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의문도 든다. 아테네가 소위 帝國 체제를 갖추며, 그리스 세계의 맹주로 활약하던 시기의 고고자료는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개인적으로 가야 문화권은 그리스 문화권을 연구하는 방법론을 좀 차용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영미권 자료를 접하는 한계가 있어서...이런! 젠장!)

그렇게 봤을때 일단 금관가야가 가야 지역의 孟主였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 하겠다. 아! 동의하지 못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지역에서 금관가야가 맏형 노릇을 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정치적으로 강력한 상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하기에 경상도 각 지역에서 확인되는 고분군들은 가야 문화권 내에 다수의 정치체가 존재했다는 근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혹시 지방에서 중앙과 비등한 거대한 고분군이 확인된다면, 이를 블레이드님은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하다. 필자를 포함한 고고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런 경우라면, 지방에도 중앙에 비등한 정치체가 존재라고 인식한다. 대신, 고분 내의 출토유물 조합상을 통해 양자가 어느 정도 종속관계에 있었는지, 대등했는지 여부를 따진다. 이에 대해 블레이드님은 어떻게 이해하실런지? 혹은 문헌사학자의 일반적인 이해 방향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 ※

아! 그리고 포상팔국을 신라가 제압한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로 인해 가야가 문헌에서 사라지고, 더 이상 신라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한 것이다. 신라가 포상팔국도 진압하고, 가야도 어느 정도 복속시켰다고 봐야 하는가? 여기에 필자가 갖는 의문이 있다(문헌사학과 관련된 부분이니, 질문이 좀 많더라도 이해해주시길).

1. 고고자료 상 2세기 말~3세기 초 신라식 고고자료가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그 서쪽(혹은 서남쪽) 지역까지 확대된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야식 고고자료가 더 강화되고, 일본 열도식 문화와의 교류가 주목된다. 즉, 김해 지역의 정치체(가야)가 그 뒤로도 더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다고 볼 수가 있는데, 이는 문헌과 맞지 않는다. 그럼 이건 뭐라고 봐야 할까? (음...이건 고고학적인 내용이 있으니, 이에 대해서 블레이드님께 꼭 답을 요구하고 싶지는 않다. 필자 개인적으로 공부가 더 필요한 부분이니)

2. 이후 신라사에 가야가 다시 인식되는 것은 지난번 글에도 언급했지만 5세기가 되어서이다. 중간에 왜가 계속 나오던 시기가 지나고 다시 가야가 나오는 이유(그리고 왜는 더 이상 안 나오는 이유와 같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이를 동일선상에서 연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라사에 나오는 신라의 主敵 계보를 '가야 → 왜 → 가야'로 이해하고자 한다(물론 뒤에 나오는 가야는 문헌도 그렇고, 고고자료도 그렇고 신라에 상당히 복속된 상태였다는 것을 같이 증명하니깐 주적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일단은).

필자는『삼국지』의 기록이 한반도의 고대국가 발전단계를 늦게 기술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게 문헌을 주로 다루는 입장과 옆에서 부수적으로 다루는 입장 차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식민사학과 관련하여 문헌사학계가 그렇게 만들어놓은 이미지가 더 강한 것이 아닐까 싶다. 고정관념이랄까 이런 거(예를 들면, 고고학계에서의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그렇다. 故 김원룡 선생님께서 처음에 이 용어를 제시했을 때는 '삼국시대지만 고고자료가 부족해 原史 단계로 분류된 시대'로 쓰셨다. 즉, 이는 고고자료가 자꾸 확인된다면 얼마든지 삼국시대로 편입이 가능한 가능성 여부를 전제한 용어다. 하지만 그런 자료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렇게 대량으로 한번에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원삼국시대라는 용어는 계속 쓰고 있으며, 마치 삼국시대만큼 발전되지 않은 단계로 이해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불만을 갖는 부분이기도 하다. ^^;).

『삼국지』를 보면 3세기 무렵'까지' 한반도 서남부 혹은 남부에 50여개가 넘는 소국들이 난립한 것처럼 적고 있다. 분명히 넓은 영역인데,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완전 전국시대도, 이런 전국시대가 없을 것이다. 특히 성이 없는 지역도 있고, 성이 있는 지역도 있다는 서술은 더더욱 그런 시각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고대 국가'의 조건으로 성곽을 필수조건으로 치는 것에 반대한다. 지방 수장층의 중심지에 반드시 성이 있을 필요도 있으며, 이는 최근 연기 나성리 유적에서 나온 다수의 KG 건물지들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분명 나성리 유적에 살던 집단도 방어의 개념을 알고 있었을텐데, 왜 그랬을까? 의문이었다. 기존에 필자는 막연히 '50개가 넘는 나라가 수세기동안 변함없이 옹기종이 모여있다면, 이건 청동기시대도 아니고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얘들이 韓 안에 정치적으로 다 포함된 집단이어서 내부적으로 갈등이 조성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럼 방어적 목적이 강한 성이 필요없는 지역도 있었을테고...'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번에 나성리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그런 생각을 어느 정도 다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3세기대 나오는『삼국지』영역 내의 고고자료들을 보면 절대로 고대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단, 문헌상 블레이드님 얘기대로『삼국지』의 영향 때문인지, 그러한 집단을 국가로 얘기하지는 않고 정치체 혹은 '국'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특히 백제고고학 분야에서 더 심하다. 신라는 경상도 일대에서 이른 시기부터 존재했기에 경주 주변에서 다양한 정치체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다 하더라도 신라사와 가야사를 중심으로 서술하곤 한다(문헌에 명확하게 특정 정치체에 대한 언급이 나오니깐). 하지만 백제의 경우,『삼국사기』에 뚜렷한 지방 세력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마침 그 공백을『삼국지』가 채우고 있기에 서술에 더욱더 난처함을 겪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고구려를 비롯한 동옥저나, 예 등은 별개의 존재이고.

물론 필자가 이런 내용을 논고에 써서 얘기하지 않기에, 여기에서의 필자 생각은 공허한 외침일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전공을 바꿔 필자가 백제나 가야, 신라 관련 논고를 작성하지 않는 이상. 암튼, 필자는 개인적으로『삼국사기』와『삼국지』의 기록을 굳이 같은 지역에 대한 다른 시각에서 쓰인 문헌일까? 에 대해서 의구심이 든다. 시각을 바꿔 보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 학계 일각에서는 '국'과 '국가'를 나눠 이를 하나의 일련적인 발전단계에서 이해하기도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말장난 같다는생각이 든다. 국가라고 하는 것이 이전 시기부터 단계적, 점진적으로 발전과정을 겪는다고 봐야지, 중간에 어떤 획기적인 시기를 선으로 딱 그어놓고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달라진다고 볼 수 있을까? 이전과 전혀 다른 문화양상이 나타난다면야 당연히 획기를 그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그렇게 획기를 그을만큼 확연히 다른 고고학적 양상만 주목하고 점진적인 변화상은 주목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필자 개인적으로 초기 백제와 마한과의 관계를 고고학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이런 점진적인 부분을 정밀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문헌사학계나 블레이드님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하다. 국가라고 하는 것이 국과 다르다고 봐야할까? ※


2. 근초고왕의 마한 정복

아! 위에서 언급한 부분과 연결될 것이다.

백제의 정복이 고고학적으로 설명되려면(순전히 고고학적 입장이다), 그 시기 한성백제 중앙(풍납토성에서 나온 흔적이든, 이성산성에서 나온 흔적이든...더 포괄적으로 경기도 일대에서 나온 흔적이든)의 고고자료와 동일한, 혹은 그에 준하는 고고자료들이 소위 마한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각지에서 4세기대를 기점으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고고자료상 4세기에 획기를 그을만한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전 단계(원삼국시대)부터, 점진적으로 발전하면서 주변 문화(주로 한성백제)와의 교류 속에서 천천히 문화양상이 변화하는 모습이 확인될 뿐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삼국사기』의 내용대로 백제가 마한을 1세기대 정벌했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고 딱히 1세기대 백제의 고고자료가 마한 지역에 나타나는 현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점토대토기문화로 대표되는 초기철기시대에 대해서도 약간의 자료를 찾아봤지만, 점토대토기문화가 기원전 5~4세기까지 올라가는 시점(더 올려보는 연구자도 있다)에 그것과 교체되는 후행 문화와의 연관성을 잘 찾아보질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점토대토기문화가 끝나고 뒤이어 원삼국시대가 도래하면서 토기를 비롯한 각종 유물, 유적의 변화상은 확인된다. 그런데 그 원삼국시대로 분류된 시기에 마한 지역에 존재했던 정치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고 있다. 분명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로 변화하는 그 과도기는 백제가 건국했다는 시점과 맞물린다. 물론 과거 낙랑군의 영향으로 원삼국시대 문화가 크게 변화했다고 보고, 최근에는 낙랑군의 영향이 과대해석되었다고 하면서 이를 위만조선 단계의 재지계 문화(물론 그 문화는 전국시대 중국문화와의 교류에서 시작했다고 보지만)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원삼국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전 시기와 다른 외부 집단의 영향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마찬가지로 송국리문화 이후 도래하는 점토대토기문화도 외부 집단의 영향으로 이해하고 있다). 단, 그것이 백제 초기 있었던 마한 정벌과 관련된 것보다는 점진적이면서 자체발전적인 면모, 교류와 이주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더 많다는 것 뿐이다.

다시 말해...근초고왕의 4세기 마한 정벌에 대한 고고자료의 변화상보다, 1세기 무렵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로의 전환기에 확인되는 고고자료의 변화상이 더 크다고 볼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백제가 마한을 정벌한 시점을 고고학적으로 해석한다면,『일본서기』를 2주갑 인상해서 재해석한 근거보다,『삼국사기』에 나온 기록을 근거로 삼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이건 단순히 중앙의 문화와 지방의 문화 차이가 아니다. 조선시대와 지금의 대한민국을 언급하셨는데...조선시대 이후로야 중앙은 서울이고, 변방 시골은 지방이라는 것이 정치-문화적으로 도식화된 것이 오래이다. 그런 상태라면야 당연히 문화의 전파-수용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고, 블레이드님의 생각이 옳다. 하지만, 당시 삼국시대 각국의 중앙과 지방의 정치적 관계가 지금과 같지 않던 시기였다.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에는 분명히 조선시대 및 대한민국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앙집권화가 상당히 잘 이뤄졌고 그것이 고고자료로 확인되지만, 백제는 예외적이었다. 늘 얘기하듯이 지방 수장층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백제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방 수장층의 흔적이 확인되는 각 지역은 그 자체만으로 그 일대의 중심지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백제 입장에서 그 각 지역의 중심거점을 단순히 지방으로 인식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당시 백제 사람들의 머릿 속을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 그런데 각 지역의 중심거점에서 확인되는 거대한 고분과 금동관 및 다양하게 확인되는 위세품을 보면 적어도 각 지역의 중심거점에 있던 정치체들은 자신들을 단순히 백제의 지방으로 인식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그런 녀석들이었다면, 백제 중앙부에서도 나오기 힘든 거대한 고분을 조성했을까? 싶다(거꾸로 이성산성 얘기를 자꾸 하는데, 이성산성이 만약 서울에서 가까운 하남시가 아니고, 보다 먼 지방에서 나왔다면 그 역시 지방 수장층의 거점이라고 언급될 정도라고 생각한다). 즉, 백제가 각 지방을 무력으로, 혹은 외교적으로 흡수 혹은 통합했다면, 그 지역에는 백제 중앙정부의 의지가 투입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물질자료로 확인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편입된 이후에는 그 지역이 백제의 지방이 되었으니, 문화적으로 중앙과 변방에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실제 백제 중앙과 변병의 문화적 차이를 고고학적으로 서술한 논문도 있다(클릭). 그리고 그 시점은 사비기를 많이 언급한다.

즉, 애초에 중앙과 지방 관계가 아니라, 각 지방 거점이 나름의 중앙이라는 개념을 갖추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특정 중앙에서의 문화가 다른 거점으로 전해지는 것을 단순히 중앙 → 지방으로 문화 전파라고 볼 수 있냐~라는 의문이 드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확실한 문화 전파의 흔적은 6세기 영산강유역의 대형 옹관묘가 사라지고, 횡혈식석실묘+옹관이 나오다가 백제식 횡혈식석실묘로 전면 교체되는 것 밖에는 없다. 일단. 그래서 6세기 무렵까지 백제가 중앙을 확실하게 통제하지 못 했다고 한 것이다. 단, 이 영산강 세력이 국초부터(기원전 1세기) 주욱 이런 세력을 유지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지역에서의 옹관묘도 3세기 이전에는 안 보이는데다가, 5세기 이전에는 대형화되지도 않아 지방 수장층이라 보기에 미약하니 말이다.

이 정도만...점심 시간이라. ^^

 


덧글

  • DreamersFleet 2011/06/18 19:46 # 답글

    전기가야 후기가야 하니까 역사스페셜 등등의 애청자로서 가장 떠오르는게 "부산 복천동 고분군"인가 봅니다. 이 고분군이 중단된 것이 금관가야 멸망이라는 것을 수십번도 더 들었던 것 같습니다. 복천동 세력도 그냥 그저 그런 세력이지 고고학적 유물 분포상의 맹주는 될 수 없는가 봅니다.

    그러나, Archaeology님의 말씀도 문제는 있습니다. 어찌되었던 그 시기가 언제였던 6가야의 맹주였던 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사서상에 나타난 바인데, 결국 도대체 언제를 고고학적으로 그 그곳을 맹주라고 할 수 있었을런지요? 결국 금관가야의 몰락은 소위 무역항으로서의 김해지역의 쇠퇴라고 봐야 할지요? 그렇다면 무역항으로서의 쇠퇴는 고고학적으로 어느 시점 쯤 되려는지?
  • Warfare Archaeology 2011/06/19 08:42 #

    김해 양동리 고분군 182기(초기부터 후기까지 다양), 김해 양동리 고분군 548기(기원전 2~기원후 5세기), 김해 칠산동 고분군 119기(3~6세기), 김해 대성동 고분군 241기(규모와 부장품 등으로 구야국의 중심고분군으로 파악) 등 김해 지역에서는 이와 같이 어마어마한 고분군들이 다수 확인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당시 맹주지위는 금관가야였다고 해도 상관이 없겠죠.

    그에 반해 부산 복천동 고분군 100여기(3~7세기), 부산 화명동 고분구 7기(4세기), 부산 연산동 고분군 10기(5~7세기), 부산 반여동 고분군 31기(4~6세기) 및 무산 괴정동, 오륜대, 덕천동, 당감동, 노포동, 생곡동, 복천동 내성유적 등 다양한 고분군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함안 도항리고분군처럼 아라가야의 중심고분군으로 보이는 곳에서 30여기의 고분이 확인된 것에 비한다면 분명 적지 않은 규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문헌 상의 정치체 누구다! 라고 정해져 있지 않은 지역의 고분군 중에서도 몇손가락 안에 드는 대규모이기도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지역의 맹주는 아니더라도(제가 복천동 고분군에 대해 맹주라고 표현했었나요? ^^;) 한 지역의 수장층으로 보기에는 충분하다 이겁니다. 다만, 전기가야의 맹주가 금관가야고 나머지는 다 정치적으로 그 밑에 예속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가? 싶은 거였죠.

    그런데 문헌에는 6가야의 맹주로 금관가야를 지목하고 있죠.『삼국유사』의 내용에 따르면요. 그걸 무시하고 싶지는 않지만...가야 문화권 초기의 고고자료를 보면, 딱 6가야로 지역을 나눌만큼 고고자료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인 듯 싶습니다. 오히려 김해가 유독 눈에 띄긴 하지만, 부산처럼 지역 세력이 여기저기 산재해있는 양상이라서 말이죠. 거기에서 만약 6가야를 1대1로 등치시킨다면, 이건 후대 학자들이 임의로 정한 기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금관가야가 맹주였다~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김해 지역이 가장 강력했다~라고 보는 것에는 의문이 없습니다. 단, 나머지들이 그저 그런 세력들이 아니었다 뿐이지요.

    김해가 무역항으로서 쇠퇴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삼국시대까지만 하더라도요. 가야가 쇠퇴한 이후에는 신라가 차지하고도 계속 무역항으로 쓰였으니깐요. 다만, 부산 등지를 신라가 차지한 이후, 이 지역도 무역항으로 번성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가야 후기에는 김해를 신라가 차지한 후, 소가야와 아라가야 등이 세력을 확장시켰던 것처럼 다른 지역의 무역항도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단, 김해 지역의 중요성이 그만큼 낮아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정치체가 교체된 것 뿐?
  • DreamersFleet 2011/06/18 20:21 # 답글

    (1) 삼국사기 曰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畵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온조 창업시 백제 남계는 웅천(熊天) 즉 공주까지였고 24년조에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아래에 마한이란 나라가 있었던 같아 보이지만 "마한은 고구려다"란 설이 있지요. 그리고 26년에 마한을 멸망시키지요.

    (2) 일본서기 曰 신공황후 때에 즉 근초고왕 때에 "擊新羅而破之。因以平定比自㶱。南加羅。喙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仍移兵西廻至古爰津。屠南蠻。忱彌多禮彌多禮。以賜百濟。"란 말이 있죠. 즉 가라에서 서쪽으로 진격해 남만과 침미다례를 쳐서 백제에게 주었다.

    (3) 삼국사기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웅진 천도이후에 대해서 남방 경영에 착수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문주왕 夏四月 耽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동성왕 20년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 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 乃止 에 광주에 왕이 진군한 일이 있죠.

    ==================================
    Archaelology님 말씀에 따르면 (1)은 근거가 있다.
    (2)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는 저도 못들어 본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남만의 일본식 독음은 아리히시노카라쿠니
    나는 전혀 얼토당토않은 발음이고 침미도 토무라고 발음하던 것으로 봐서 오히려 일본내의 지명이 아닌가 합니다.
    (3)에 대해서는 백제 관식이 등장한다던가로 익히 잘 알려졌으니 근거가 있습니다.
    ==================================
    확실히 (2)의 일본서기에 대해서는 어떤 고고학적 근거도 없는 듯 합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6/19 08:45 #

    (1)은 근거가 있다기보다, (2)라고 하는 것보다 (1)이라고 하는 것이 고고자료를 문헌에 끼워맞추기에 더 합리적이다...입니다. 확실히 (1) 시기에 변화상이 감지되지만 이것을 백제의 마한 정벌과 관련된 것과 연결시키는 것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고구려와 같이 군사활동을 했던 마한이나, 마한은 고구려다~라고 하는 부분은 고고학적으로는 어떻게 설명을 못 하고요. 이 부분은 문헌사학자 분들이 설명을 좀~^^

    (2)는 아직까지 제가 고고자료상 변화를 찾아본 적은 없습니다. 블레이드님은 4세기를 수수께끼의 시기로 말씀하시지만, 고고학계에서는 과거 원삼국시대를 구분하던 시기도 그러했고, 4세기보다 오히려 3세기를 중시하는 듯 합니다.

    (3)은 영산강 유역의 모든 고고자료가 이렇게 반증하고 있습니다. 단, 문주왕 시절의 탐라와 관련된 기록을 고고자료로 살펴보는 것도 아직까지는 무리가 있습니다. 제주도의 고고자료는 원체 독특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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