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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를 바라보는 시각 신라-가야사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차이 by W.A.

네이버 블로그의 타카마츠님이 '김태식 선생님의 학설이 현재 고고학계에서 어떻게 비판받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해 주셨고, 그에 대한 답글로 작성한 것인데, 참고하기 바란다(원문).




기존에는 가야사 연구에 있어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가 주로 다뤄졌으나 최근에는 가야 각국에 대한 연구가 세부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1. 하지만 이런저런 변화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가야 각국의 사회발전단계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잘 알다시피 이전에는 가야를 고대 삼국처럼 국가단계로 발전하지 못 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죠. 그러다가 최근에는 연맹왕국이었다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 서울대학파가 고수하는(?) 부체제 이론을 따다가 가야를 고대국가 이전의 부체제 단계였다고 보는 견해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태식 선생님의 주장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하 연구사와 관련된 내용은 남재우 선생님의 논문 내용 중 상당 부분을 인용했음을 미리 밝히는 바입니다
2. 일반적으로 사회발전단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모오간의 '부족국가-부족연맹-고대국가'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족'과 '국가'가 같이 쓰이는 것에 문제가 있다 하여 '성읍국가' 혹은 'Chiefdom'과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하지요. 뭐 굳이 따진다면 그리스와 같은 도시국가를 생각하면 좋을 듯 합니다. 그래서 '성읍국가-연맹왕국-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표현되기도 하고, 치프덤을 소국연맹체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연맹왕국'이라는 표현 자체가 갖는 모호함 때문에 천관우 선생님은 '성읍국가-영역국가-고대제국'으로3, 김정배 선생님은 '무리사회(band)-부족사회(tribe)-군장사회(chiefdom)-초기국가(state)'로 표현하기도 하셨죠(어찌보면 아직도 이 구분법을 가장 많이 쓰는 듯 합니다)4.

암튼, 가야로 다시 돌아와서...가야 연맹체를 설명하는 이론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 단일연맹체론

가야를 연맹체로 보는 시각은 이병도 선생님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저도 직접 관련 원문을 못 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
5. 가야를 연맹체로 보는 시각의 기초를 만드셨다고 하는데, 그 견해를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령의 대가야를 上加羅, 김해의 본가야를 下加羅로 보고, 상가라의 본명은 미오야마국(『삼국지』「한전」에 나오는 변진 제국 중 하나), 하가라의 본명은 구야국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연맹체 이전의 구야국은 부족국가였으며, 이는 시기적으로 위만조선때인 B.C 2세기대로 보셨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의 맹주국은 상가라, 그 다음의 맹주국은 하가라인데 수로왕이 등장하는 때가 하가라 맹주국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로왕의 등장 시점을 3세기대로 본다는 것이었고요. 이병도 선생님 설은 처음 접했는데, 뭔가 김태식 선생님의 주장과 기본적으로 틀은 같지만, 내용면에서는 상당히 차이가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튼, 이러한 인식은 이후 다른 학자들에게도 전해졌고, 가야시대 전기를 읍락국가연맹, 후기를 가야연맹(아마 보다 발전된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겠죠?)으로 보는 시각도 나왔다고 합니다6.

그리고 이걸 보다 체계화한 것이 바로 김태식 선생님인 거죠. 일단 김태식 선생님은 가야를 전기가야연맹, 후기가야연맹으로 정리했으며 전기는 1~4세기 동안 김해 가락국을 중심으로 한 시기, 후기는 5~6세기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시기로 구분했습니다. 이미 1993년에 쓴『가야연맹사』에서 이런 내용을 구체화시켰으며, 2002년에 쓴『미완의 문명 700년 가야사』1~3권에서 보다 자세하게 정리한 바 있습니다(아마 이 책을 타카마츠님이 보셨다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때 전기와 후기를 나눈 획기는 바로 400년 광개토태왕이 벌인 경자대원정이었고요. 여기에서 문제점은 대가야와 함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는 함안의 安羅國(아라가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함안 지역은 고고학적으로 분명 고령 지역과 차별화가 나타나는만큼 동일한 정치권 혹은 사회 · 문화권으로 보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안이 나옵니다.

둘째 - 지역연맹체론

이는 어디까지나 안라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대가야연맹이 아니라 고령-함안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연맹체가 후기 가야사회라는 것입니다
7. 즉, 전기는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지만, 후기의 경우에는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안라국이 남북이원체제를 이뤘다고 보는 것이죠(이는 김태식 선생님도 주장한 바 있는데, 백승충 선생님은 이미 남북이원체제가 있다는 것 자체가 단일연맹체론과는 맞지 않는다고 보고 이처럼 지역연맹체론을 내세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 기타 학설(고대국가론에 가깝다)

천관우 선생님은 가야를 早期가야와 晩期가야로 나누고, 전자의 중심으로 김해 구야국으로서 200년경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고 보십니다. 그리고 후자의 중심은 500년 이후, 고령의 대가야로 보고 이미 가야는 4세기 이후 국가(성읍국가 또는 소규모의 영역국가) 단계였다고 해석한 바 있습니다
8. 그밖에 이영식 선생님은 4세기 말~5세기 초 가야가 이미 만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것을 보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수준이기 때문에 그 이전을 군장사회, 그 이후는 도시국가 단계로 규정해도 무방하다고 보고 있습니다9. 거기다가 주보돈 선생님은 역사가 긴 가야이기 때문에 역사 전체를 묶어서 연맹체, 국가 등으로 분류할 것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내재적으로 발전하는 몇개의 단위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고도 하셨죠10. 당장 제가 인용하고 있는 남재우 선생님도 가야를 국가단계로 보고 있고요. 그밖에도 여러 학설들이 있는데(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야마모토 선생님의 주장이 가장 흥미롭다. 영산강유역과 대가야를 두고 독자적인 정치체라고 해석했지만 사회발전 수준상 전자는 국가단계에 이르지 못 했고, 후자는 충분히 삼국과 마찬가지로 국가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발전속도가 빠르고 느리냐의 차이일 뿐 문화 수준 자체가 더 낮다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11), 저 역시 가야가 초창기에는 고대 삼국과 마찬가지로 소규모로 시작했지만, 점차 발전하여 국가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습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고, 일단 여기까지는 남재우 선생님의 논문 상당 부분을 요약했음을 다시 한번 밝히는 바입니다).

즉, 기본적으로 '연맹'이라는 용어가 적절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부터 김태식 선생님의 주장은 비판받고 있습니다(뭐 따지고 보면 서울대학파의 기본적인 생각이 변형-발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에 김태식 선생님이 최초로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가야사를 고고학계에서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겠죠.

고고학계에서도 가야사를 전기와 후기로 나눠서 봅니다. 단, 연맹이니 뭐니 그런 문헌사학자들이 만드는 모델은 제외하고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구분하되 이는 김해 대성동고분의 축조중단 시점을 기준으로 획기합니다
12. 토기 양식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죠. 김해 대성동고분군이 축조 중단되면서 이전까지는 공통양식토기가 존재하다가 이후부터는 가야양식과 신라양식토기가 공존하게 됩니다. 즉, 이때부터 진정한 신라양식의 토기가 출현했다고 볼 수 있는 셈이죠(물론 이 글에서 신경철 선생님은 김태식 선생님의 모델을 부정하고 계시진 않고 있습니다). 다케스에 선생님의 경우에도 '전기가야'나 '후기가야'라는 표현은 쓰지만 그 사회발전단계를 가늠하는 수식어는 따로 붙이고 계시지 않습니다13. 아마 한국이나 일본이나 고고학계에서 가야를 바라보는 시각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만약 아닌 부분이 있다면, 이건 전적으로 제가 두루 살펴보지 않은 탓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밖에 이희준 선생님은 합천댐 수몰지구 고분 자료를 통해 대가야가 국가단계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14. 이 지역에서 '하부'라고 쓰인 토기가 나왔는데, 김태식 선생님은 합천댐 수몰지구가『일본서기』에 나오듯이 독자적인 외교권을 행사하던 다라국(多羅國)에 속하는 곳이므로 이곳을 대가야의 하부로 보게 되는 경우 부체제 관념과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백제와 연관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합천읍 일대와 동일한 정치체의 영역이 될 수 없으며, 다라국에 속한다고 보기 힘들고 백제와 연관시킬 수도 없다는 것이 이희준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김태식 선생님은 이에 대해 '가야연맹 멸망 직전에 합천 저포리 지역에 밀려왔던 백제 계통 문물 또는 인물의 왕래, 또는 그에 대한 반감과 관련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 있죠15. 물론 이희준 선생님은 이것이 공정한 관점이 아니라고 보고 계시고요.

더불어 박광춘 선생님은 전라북도 남원에 위치한 월산리고분을 봤을때 대가야연맹설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16. 기존에는 월산리고분군 중 가장 대형인 M1-A호가 고령 지산동고분군과 성격이 유사하다고 하여 월산리고분군 축조세력이 대가야에 예속된 것으로 보았고, 원래 문헌사학자에 의해 주장된 대가야연맹설은 이후 대가야를 연구하는 고고학자(한국의 우지남, 일본의 定森秀夫 등)에 의해 대가야연맹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죠. 이후 김태식 선생님이 이를 근거로 가야 북부는 대가야연맹, 남부는 남부연맹으로 이분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위에서 언급한대로 비판받고 있는 상태구요. 그런데 송학동고분군이 발굴조사됨에 따라 박광춘 선생님은 오히려 월산리고분군이 송학동고분군과 닮은 점이 더 많다고 하십니다. 고분의 형태가 인근의 고성 송학동고분군 및 내산리고분군처럼 다곽식이며, 출토 토기 또한 단순하게 고령지역의 대가야양식 토기와 비슷하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대가야와는 어느 정도 관련성이 언급될 수 있을 뿐, 오히려 소가야와의 연관성이 더 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를 남원 지역만의 특징으로 보고『일본서기』에 보이는 반파국(伴跛國)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세기 선생님은 대가야를 고대국가로 보지 못하고 연맹체의 내부구조나 상호간의 관계 등 연맹체에 대한 실체적 규명없이 후기가야연맹이나 대가야연맹 등으로 부르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17. 선생님은 보국장군 본국왕이라는 호칭, 대가야 금관과 대왕명 토기, 관직의 분화와 부체제, 예악과 건국신화 등을 근거로 당시 대가야는 국가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고 계십니다. 특히 대가야가 국제무대에 등장해 작호를 받은 479년부터 고대 국가로 성립하였고 530년대 신라의 팽창정책으로 다시 분열할 때까지 50여년간 고대국가로 존재했다고 보고 있는데, 이에 대해 김태식 선생님은 그렇게 짧은 기간에 나타난 몇가지 주장만으로는 대가야가 고대국가라고 보기 힘들다고 했습니다(김세기 선생님이 이전에 썼던 논문을 비판하며). 하지만 중국사나 한국사에도 채 50년이 안 되는 국가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국가의 형성조건에 시간만 갖고 따져서는 안 될 노릇이지요. 더불어 김태식 선생님은 '대가야의 발전단계를 신라와 비교하고, 고대국가의 구성요소를 치밀하게 분석하여 초기 고대국가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면서도, 역시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 때문에 고대국가로 단정짓지 못하고'18있어 이 부분을 지적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상입니다.

일단 '연맹'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문제점이 있을 수 있겠고, 김태식 선생님이 기본적으로 가야사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 자체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거기다가 고고자료 해석에 있어 김태식 선생님이 여느 고고학자보다 더 치밀하다고 느낄만한 연구성과도 그렇게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김태식 선생님이 직접 유물이나 유구를 편년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해석된, 보고서로 발간된, 자료화된 것들을 문헌사학자의 입장에서 인용하고 정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희진 선생님이 고고학적 성과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김태식 선생님을 언급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이희진 선생님은 1998년에 발간된『加耶政治史硏究』에서부터 김태식 선생님과 고고자료에 대한 생각을 아주아주 일관되게 갖고 계시더라고요. 물론 최근에 읽었던 책에서도 그런 모습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고요. 참고로 책에 나온 내용 일부를 옮겨보겠습니다(19~20쪽).

고고학 성과를 이용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상당한 양의 고고학 성과를 나열하고 있으나 이를 적용할 수 없는 것까지 무리하게 근거로 삼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20년 정도에 불과한 정치상황의 변화가 고고학에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加耶聯盟史』의 서술이 가야사를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각 시대간이 연속성이 부정되어 각각의 시대가 단속적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게 된 것도 사료와 고고학 성과를 다루는 태도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5세기 이전의 사료를 부정하고 구체적인 설명을 제공해 줄 수 없는 고고학 성과를 과신함으로써 사료들간의 인과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4세기의 가야사는 부정과 추측만 남고 4세기 말~5세기 초는 공백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5세기 중엽~6세기 중엽만이 비교적 체계를 잡게 되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가야사의 흐름을 제시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태식 선생님이 고고학 성과를 인용해 이러저러한 주장을 한 것이 왜 고고학계의 잘못인양 책에 지속적으로 서술되는지, 이희진 선생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오히려 김태식 선생님의 주장은 고고학계에서 이렇게 비판받고 있는데 말이죠. 혹시 김태식 선생님이 서울대학파(이희진 선생님이 식민사학의 잔재가 가장 많이 남은 집단으로 생각하는!) 중에서 가야사를 전공하는 연구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암튼, 김태식 선생님이 가야사 연구에 있어 하나의 모델을 만들어냈고(다듬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지만), 그것이 비판받는 과정에서 가야사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하게 진전된 것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칫 미묘한 표현상의 차이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아! 개인적으로 저는 그게 궁금하네요. 문헌사학계에서는 오히려 김태식 선생님의 학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고 말이죠. 만약 문헌사학계 내부에서 이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암튼, 작은 바램이라면 이희진 선생님이 이후로 책을 쓸 때에는 가야 관련해서 고고학계의 최신 연구성과나 이론도 좀 소개했으면 합니다. 십년이 넘도록 김태식 선생님의 주장과 고고자료 사용에 대해 일관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데, 솔직히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상입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1. 남재우, 2003,『안라국사』, 혜안.
    백승옥, 2003,『가야 각국사 연구』, 혜안.
  2. 남재우, 2004,「加耶聯盟과 大加耶」『大加耶의 成長과 發展』, 고령군 · 한국고대사학회.
  3. 천관우, 1989,「삼한사」『고조선사 · 삼한사연구』, 일조각.
  4. 김정배, 1986,『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출판부.
  5. 이병도, 1985,「가라사상의 제문제」『한국고대사연구』(수정판), 박영사.
  6. 김정학, 1982,「고대국가의 발달(가야)」『한국고고학보』12, 한국고고학회.
    ______, 1990,『한국상고사』, 범우사.
  7. 백승충, 1992,「가야의 용례 및 시기별 분포상황-'가야연맹체' 개념의 적용과 관련하여」『부산사학』22, 부산사학회.
    ______, 1995,「가야의 지역연맹사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8. 천관우, 1991,『가야사연구』, 일조각.
  9. 이영식, 1985,「가야제국의 국가형성문제-'가야연맹설'의 재검토와 전쟁기사분석을 중심으로-」『백산학보』32, 백산학회.
  10. 주보돈, 1995,「서설-가야사의 새로운 정립을 위하여」『가야사연구』, 경상북도.
  11. 山本孝文, 2004,「大加耶와 榮山江勢力-소위 '三國周邊'의 社會水準과 交易-」『大加耶의 成長과 發展』, 고령군 · 한국고대사학회.
  12. 신경철, 2007,「가야와 그 전환기의 고분문화」『가야와 그 전환기의 고분문화』,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13. 武末純一, 2007,「일본과 가야의 고분문화」『가야와 그 전환기의 고분문화』,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14. 이희준, 2003,「합천댐 수몰지구 고분 자료에 의한 대가야 국가론」『가야 고고학의 새로운 조명』, 혜안.
  15. 金泰植, 2000,「加耶聯盟體의 性格 再論」『韓國古代史論叢』10,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6. 박광춘, 2006,『새롭게 보는 가야고고학』, 학연문화사, pp.222-232.
  17. 김세기, 2007,「대가야연맹에서 고대국가 대가야국으로」『5~6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대가야』, 고령군 대가야박물관 ·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18. 김태식, 2003,「초기 고대국가론」『강좌 한국고대사』2권,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pp.47-86.

핑백

  • Warfare Archaeology : 임나일본부와 고고학 2011-12-09 20:08:36 #

    ... 모 블로거분은 고고학계도 식민사학에 종속되어 있다고 비판하시던데, 제가 볼때는 오히려 고고학계보다 문헌사학계가 문제인 것 같았다는 반박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http://yeohwi.egloos.com/1550852). 즉, 대가야가 과연 다른 가야들을 압도하는 국력으로 정치적으로 상하 수직적인 관계에 있었을까? 에 대해서 저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당장 장수에서 ... more

덧글

  • 2011/08/06 17:0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8/06 17:58 #

    도움되셨다니 다행입니다. ^^
  • 2011/08/07 05:3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8/07 19:08 #

    쩝...이건 또 처음 봤네요. ^^;;;;

    왜 그 한분에 그리 집착하시는지...흐음...
  • Warfare Archaeology 2011/08/07 19:09 #

    그나저나 저 위의 글을 보면...

    문헌사학계에서는 확실히 김태식 선생님에 대한 비판이 덜한 것 같나 봅니다.

    오히려 고고학계보다도 더요. 그럼 이건 오히려 문헌사학계를 비난할 일이 아닌가요? 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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