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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제국체제에 대한 고민 by W.A

문득 아침에 드는 생각을 그냥 흘리기 싫어 몇자 적는다.

고구려에 대해서 필자는 광개토태왕대를 기점으로 '제국체제(Imperial System)'로 탈바꿈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물론 그 전조는 이전부터 조금씩 확인되고 있지만). 그러한 상황을 한국사라고 하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어떨까? 예를 들면, 고구려사에서 확인되는 제국체제의 흔적이나 증거, 국가성장의 과정 들을 동시기 존속했던 백제와 신라에도 한번 적용해보는 것이다.

일단, 딱 드는 생각은 황해도 일대를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의 여부다. 흔히 대방고지로 알려져 있는 이 곳을 두고 고구려와 백제는 여러번 다툰다. 특히 4세기 초반 고구려가 낙랑을 흡수하면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완충지 혹은 제3의 세력은 사라지게 된다. 이는 대방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양국은 예성강 일대에서 직접적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이 시기 고구려는 평양을 제2의 도성으로 삼기 위해 개발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황해도 일대를 남부전선의 중심부로 개발하려고 노력한다. 남한학계는 쉽게 인정하지 않지만 오늘날 신원 지방에서 확인되는 장수산성과 그 아래 아양리-월당리유적 등을 그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물론 이런 내용을 원고에 썼지만 역시 심사해주신 분은 믿을 수 없다! 고 지적해 주시긴 했지만...).

암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예성강변을 두고 양국이 엄청 대립하고 있는데, 황해도에 장수산성을 축조하고 주변 일대를 개발한 고구려와 달리 백제의 임진강~예성강변에 대한 적극적인 경영의 흔적인 찾아보기 힘들다. 고구려는 새로 흡수한 주변부를 중심부로 영역화하면서 또 다른 주변부와 변경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지만(대부분의 제국이나 정복국가가 끊임없이 과대팽창을 하는 이유가 이것일게다), 고구려의 攻勢에 백제는 점점 남으로 후퇴하고 만다. 특히 대방고지를 두고 양측이 서로 변경으로 인식했던 시기와 달리 광개토태왕대가 되면 단숨에 고구려의 영향력은 한반도 중부 이남으로 확산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양국의 미래는 황해도 일대에서의 다툼이 끝이 났을때 이미 결정됐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다시 뒤집어 생각해보면...백제가 아닌 마한의 입장에서 한번 기원전후 상황도 되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흔히 백제의 입장에서 그들이 어떻게 소국으로 시작해 마한을 흡수하고 한반도 중서부를 차지했는지를 주로 얘기한다. 하지만 뒤집어서 마한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왜 마한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 백제에게 줬을까? 혹시 마한은 변경에 외부세력을 정착해두고 동북쪽으로 오는 침략자에 대한 첨병이나 방패막이로 이용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럼 이 역시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시각 속에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위만에게 쫓겨난 고조선의 준왕 세력 혹은 토착세력 등 다양한 세력으로 이뤄진 마한의 정치체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많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백제는 담로제도라고 하는 아주 독특한 지방분권적인 지방통치체제를 고수하였다. 백제 후기까지도 22담로가 있었다는 것을 보면 백제 초기에는 더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삼한 50여개국에 대한 기록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으며, 그러한 고유의 통치체제를 이어받은 백제였기에 고구려와는 조금 다르지만 이 역시 중층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지는 않았을까? 즉, 최고 수장 밑에 몇개의 거대한 지방 거점세력이 있고, 그들 밑에는 다시 몇개의 거점세력이, 다시 그 밑에는 몇개의 거점세력이 있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를 마한 초기에 대입시켜 본다면 우리가 흔히 목지국이라고 얘기하는 마한 중심국의 입장에서 봤을때 한강유역의 백제는 몇단계 아래에 속하던 소국이었지만, 훗날 세력을 키워 결국에는 그 지위(?)가 상승해 최고 수장의 자리까지 차지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즉, 마한의 입장에서 보면 주변부에서 성장하던 녀석이 중심부를 차지한 꼴이랄까?

이러한 시각으로 백제사를 바라보면, 영산강 세력에 대해서도 조금 유연한 입장을 취할 수 있을 듯 싶다. 우리는 국초부터 백제를 중심으로만 살펴봤기 때문에 영산강 세력 역시 백제를 가운데 혹은 최상위에 놓고 그와의 관계성을 해석하는데 주목한다. 하지만 영산강 세력도 마한 초기부터 내려온 지방 거점 세력의 하나였고, 한강세력(백제)도 그러했다면 4~5세기 무렵 영산강 세력의 발흥은 그저 윗대가리가 사라지고 난 다음 여기저기서 지방 거점세력들이 군벌화되어 난립하게 된 경향을 반영한 것은 아닐까? 그 와중에 백제의 힘이 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영산강 세력이 완전 무력해서 코를 바닥에 납작 대고 기는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는 영산강 세력뿐만 아니라 최근 세종도시에서 확인된 연기 송원리의 거대 지하석실분을 조성한 세력에게도 적용된다. 즉, 어느 순간 중심부가 무너지면서 주변부가 동시에 할거하게 된 상황이 연출된 것은 아닌가 싶다. 이후 한성백제가 공주나 부여로 내려와 터를 잡게 되면서 기존의 주변부는 새로운 중심부로 개발되고, 이제는 한성백제의 古土였던 한강유역이 오히려 새로운 주변부로 설정되었던 것은 아닐런지(필자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백제의 요서경략 및 북위와의 전쟁 주체를 필자는 무너진 중심부가 아닌 발흥하는 주변부로 이해하고 있다). 실제 부여-사비기 한강유역에는 이전 시기와 같은 백제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 고구려유적 또한 보루를 제외하고는 영역화를 증명할만한 것들이 없는 것이 사실이고.

그리고 이 둘과 다른 신라는 한강유역을 완전히 영역화한다. 심지어 고구려가 충주 일대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소백산맥과 경기권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우회하여 신라를 공략하고자 했던 상황 속에서도 신라는 한강유역을 영역화하고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신라에게 있어 고구려와 백제와 같은 주변부 혹은 변경의 존재를 살펴보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삼국이 존속했을 당시 신라는 전 국토를 영역화하는 방식을 택했고, 그것이 제국이 아닌 왕국의 특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느리지만 착실하게 힘을 키운 신라는 결국 한반도 내에서만큼은 확실히 우위를 점해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통일신라 이후 발해와의 관계를 보면 온라인 상으로도 종종 논의가 이뤄지지만 대동강 유역에 대한 경영의 흔적이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 필자의 공부가 부족하지만, 아마 통일을 이룬 뒤 신라가 국력의 신장을 통해 어느 정도 이전과는 다른 국가체계로 발전시켜 나간 것이 아닐까 싶다. 외왕내제와 같은 통치체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신라가 발해와의 접경에 주변부 혹은 변경을 형성시킨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한번 해본다.

훗날 발해가 멸망하고, 신라 대신 고려가 들어섰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고려는 주변 제족들을 나름의 천하관 안에 재편한다. 여기에서도 어느 정도 중심부와 주변부가 확인되고 있다. 특히 강동6주와 동북9성이라고 하는 고려의 대표적인 영토개척 사실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는데, 동북9성을 두고 고려가 결국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마치 이는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충청도와 청원 등지에 중간 거점을 마련한 뒤 경상도까지 진출했지만 결국에는 임진강 이북만을 공고히 영역화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싶다(그러고보니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저 위까지 쭈욱 올라갔다가 내려온 것도 비슷할 수 있겠다). 제국이라는 체제 속에서 주변부를 끊임없이 중심부로 흡수하면서 주변부를 새롭게 형성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수입보다 지출이 늘어나게 되면 그 국가는 정책을 변경해야만 한다. 고구려가 한반도 중남부를 황해도~임진강 이북처럼 공고하게 영역화하지 못 했던 이유에는 지배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투자 대비 효과라는 측면에서 봤을때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한강유역을 상실했을때 돌궐의 침입이 있었고, 고구려는 결국 양자택일해야 하는 입장에서 돌궐 수비를 택하지 않았던가.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고려 역시 동북9성에 대한 지배기간이 짧았던 탓도 있지만 투자 대비 효과가 적었기 때문에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조선시대가 되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의 4군6진 개척은 마치 신라의 한강유역 영역화와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이후 조선에게 있어 변경이라는 것은 국가 통치와 관련하여 큰 영향을 미치지 못 하는 것 같다. 조선-명 초기의 여진과의 관계가 그나마 조선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주변부의 느낌인데, 이마저도 청이 들어서면서 사라지고 있다. 조선에서 진관체제나 제승방략이라는 군사제도를 실시하지만 실패했던 이유도 이러한 시각에서 살펴보면 어떨까 싶다. 필자가 보기에 마치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외출했다가 봉변을 당했다라고 할까? 뭐 이 부분까지는 정말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불과하니 여기에서 좀 멈추고...

중구난방 포스팅을 좀 정리해보자.

1. 제국체제는 중심부와 주변부의 중층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고구려는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확실하게 보이고 있으며, 황해도~임진강 이북, 임진강 이남~한강유역, 한반도 중남부 일원 등의 관방체계를 보면 고고자료로도 그러한 해석을 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2. 고구려의 이러한 제국체제를 백제와 신라에 적용하면 양국의 통치체제에 대해 다른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백제 역시 국력의 신장을 이루면서 국가체제에 변화가 오고, 이전의 철저한 지방분권적 통치체제가 후기로 갈수록 중앙집권화되고 단일화된다. 그렇지만 멸망기까지도 고구려와 같은 중심부-주변부로 이뤄진 제국체제를 만들어내지는 못 했던 것 같다.

3. 신라는 앞의 두나라와 달리 국력 신장이라는 측면에서 봤을때 제국의 단계까지 상당히 느리게 접근했다. 즉, 당이라고 하는 외세의 힘이 없었다면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라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으며, 삼국시대때는 확인되지 않던 제국체제의 흔적이 통일신라기에 언뜻 엿보인다. 그러나 북쪽에 다시 발해가 건국되고, 주변부로 과대팽창의 대상이 사라지기 때문에 북쪽(대동강 일대)에 변경을 두기는 하지만 고구려, 백제와는 다른 식의 제국체제가 자리잡은 것으로 판단된다.

4. 이후 고려가 들어서면서 북쪽에 발해가 멸망하고, 상황은 통일신라때와는 사뭇 달라진다. 고려는 주변 제족들을 자신만의 천하관에 편입시키고 주변부의 공간을 상당히 확장시킨다. 이것이 가능한 것에는 고려 북쪽의 정복왕조(요-금)들의 중심부가 중원 지역으로 점차 쏠려 오히려 동북부가 주변부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하지만 남북국시대때 통일신라 북쪽의 발해는 동북부가 중심부였기 때문에 이와는 상황이 달랐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말은 고려가 통일신라에 비해 제국체제를 유지-발전시키기에 더 유리했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 고려는 주변부에 해당했던 지역을 차지해 강동6주, 동북9성 등을 개척하지만 동북9성의 경우 실패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마치 고구려가 더 이상 과대팽창의 여지가 사라졌을 때 주변부에 속했던 신라를 중심부로 흡수하기 위해 대거 침공했다가 실패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

5. 지방통치체제와 영토경영에 대해서 논할때 단순히 토착세력의 유무, 행정관의 파견 등을 두고 반독립적인 세력이었다, 아니었다~만을 논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러프하게 정황만 살펴볼 것이 아니라 경제 · 정치 · 군사적 관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구려가 4~5세기 강력한 국력을 토대로 한반도 중남부를 무력으로 점거했으므로 영역화하여 직접통치했다? 혹은 백제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했으므로 고구려가 한반도 중남부에서 일시에 후퇴했다? 등등으로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다.

이상임...중얼중얼...

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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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rfare Archaeology : 임나일본부와 고고학 2011-12-09 20:08: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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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역사관심 2011/12/07 03:37 # 답글

    매우매우 흥미로운 추론입니다. 한번 고찰해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기 송원리의 거대 지하석실분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다가 찾아보고 깜놀했군요. 이런 뉴스를 모르고 있었다니...
  • Warfare Archaeology 2011/12/07 11:27 #

    아...그렇습니까? 문득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좀 적어놔야 겠다~싶어서 적은 거였는데.

    한번 이 부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연기 송원리유적은 모르고 계셨군요. ㅋㅋ 한때 꽤 큰 이슈였는데...
  • 역사관심 2011/12/08 17:07 # 답글

    주인장께서는 오늘 제가 올린 가야유적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지는군요. 님의 이글을 핑백걸었습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12/09 00:44 #

    음. 일단 장수 지역은 대가야의 영역 확장과 맞물려서 많이 거론되고 있는 지점이긴 합니다. 과연 그 정치적 실체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요. 일단 말씀하신 전기가야나 후기가야와 같은 구분은 김태식 선생님이 주장하는 것인데,예전에도 이와 관련된 글(http://yeohwi.egloos.com/1550852)을 쓴 적이 있는 것처럼 그 주장은 일단 비판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렇게 특정 모델을 전제하고 가야사를 봐버리면 조금 고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지 않나 합니다.

    그렇게 봤을때, 제가 보는 가야사는 개별 국가들이 과연 어떤 정치적 관계에 놓였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과연 대가야가 후기가야연맹의 맹주였을까? 금관가야가 전기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것처럼? 이걸 연맹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까? 대가야와 아라가야가 5세기 이후 후기 가야세력의 두 주축이었을까? 그럼 나머지 가야(소가야, 금관가야 등)와는 어떤 관계였을까? 상하 수직적인 관계? 아니면 상호 보완적인 관계? 어떻게 보면 아주 기본적인 것인데, 문제는 고고학적으로 이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힘들다는 거죠. 그러니 문헌사학계에서 현재와 같은 모델이 등장하는 것이겠지만요.

    암튼, 백제 영역권 내에 다양한 세력(정치체라 표현해도 무방할 듯 싶습니다)이 존재했으며...중심부가 뒤틀리자(광개토태왕의 대대적인 남정으로) 여기저기 주변부가 5세기 무렵 발흥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주변부가 각각 다른 문화양상을 지닌 서로 다른 정치체였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어차피 50여개의 나라로 이뤄졌다고 하고, 백제 후기까지도 22담로가 존재했다고 하는데 말이죠. 당장 한성백제와 충청권(공주, 연기, 청주 등) 세력, 그리고 영산강 세력의 문화양상은 전혀 다릅니다. 마치『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여기에 백제라는 나라 1개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장수의 역사적 의의를 단순히 '가야'에만 국한해서 살펴보지 말고 고고자료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가야 후기사를 대가야가 주축이 되고, 안라국이 또 하나의 경쟁세력으로 존재했다는 인식과『일본서기』를 비롯한 여러 문헌들에 기록된 사실들이 하나의 고정된 시각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가야의 세력이 전남 동부 깊숙히까지 확대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문제는 고고학적으로만 살펴봤을때 장수도 당시 가야의 세력권이었다면, 후기 가야의 중심부는 함안의 대가야가 아니라 장수에 위치했다고 하는 또 다른 가야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게 일반적인 고고자료의 해석일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현 학계에서는 기존 학설을 고수한채 그 틀에 맞춰 장수 지역의 고고자료를 해석하려 하겠죠. ^^

    장수 일대의 정치체가 백제의 주변부에 속하던 곳이었는지, 가야의 주변부에 속하는 곳이었는지는 저 역시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중심부와 주변부를 고구려 이외로 확대시켜 이해한 것 자체가 제게는 그냥 시론적인 생각,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었을 뿐이니깐요.

    암튼...몇마디 더 하자면, 가야라는 정치체는 초기 신라와 같은 영역국가와도 다른 스타일의 국가였고, 양적인 규모면으로도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봤을때 제국의 중심부, 주변부라는 개념이 적용 가능할까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야 세력권이라고 불리는 낙동강과 섬진강 일대의 영역이 주변 국가들에게 단일한 문화권으로 인식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냥 그 안에 있는 애들은 다 가야~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그 영역권 안에서 실선으로 줄 긋듯이 각 가야의 영역권이 서로 빈틈없이 딱딱 맞물리게 국경선이 나눠졌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몇몇 지역을 중심으로 거점이 있는 각 가야 사이에는 상당한 완충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 말이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백제의 50여개 소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최고 수장 대 최고 수장이 아닌, 소속된 수십개 소국들(백제든, 가야든)이 서로 얽키고 설킨 관계였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그리고 그런 소국 사이에서 고정적인 정치적 상하 관계가 있었을까? 아니면 변동적이었을까?

    예를 들어 장수 일대의 정치세력이 힘이 약했을 때는 마한 휘하의 50여개 소국 중 하나였다가, 힘을 키워 나름 영역을 확장하면서 거기에서 이탈해 가야 문화권에 동화되면서 가야 문화권 중 하나로 행세했던 것은 아닐까? 용 꼬리보다 뱀 대가리가 낫다고 하면서? ㅋㅋ 이건 어디까지나 제 소설같은 생각입니다만...고고자료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문헌의 내용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좀 다양한 생각을 해보자는 것입니다(영산강세력은 아예『삼국사기』에 없지요). 뭐 말이 너무 중구난방이네요. 휴우~암튼 이상입니다. 이상하다 이상해. 쩝...내가 쓰고도. ^^;;
  • 2011/12/09 00:5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1/12/09 06:4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12/09 09:44 #

    음. key point는 역시 님 말씀대로 '왜 갑자기 5세기 무렵에 주변부에서 다양한 정치체들이 발흥하기 시작했을까?' 입니다. 중심부와 주변부로 세상(?)을 나눠 봤을때 중심부가 작살났을 때 주변부가 발흥하는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봤을때 개깨지고 남하한 한성백제 애들을 보듬어줘서 왕조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공주-부여 지역의 토착세력이라든가, 거대한 고분을 축조하고 금동관을 쓰던 영산강 세력, 대규모 고분군을 조성하거나 당시 최대규모의 석실분을 조성했던 연기, 화성, 청주, 천안 등지의 정치체들이 한순간에 튀어나왔다고 보기는 힘들 듯 합니다.

    물론 고구려에도 지방군벌의 존재가 확인됩니다. 일반적으로 대형 성곽 주변에는 항상 산밑에 고분군이 조성되어 있죠. 국내성이나 평양 등지에서 확인되는 고분군의 규모와는 큰 차이가 납니다만, 그래도 각 지역의 행정-군사거점으로 판단되는 대형 성곽 주변에 고분군이 어김없이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고구려에서도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지방 군벌 혹은 지방 유력자(토착세력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가 존재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 고구려 역사상 그러한 지방 세력이 중심부의 붕괴로 인해 주변부에서 발흥한 흔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제국체제가 완성된 이후에는 환도성 간주리의 경우가 거의 유일하다랄까요? 물론 실패해서 사형당했지만...

    그렇게 봤을때 저는 광개토태왕의 백제 공격(이 백제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한성백제와 동급인지,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 겠지만요)이 그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데서 이유를 찾아야 겠지만, 아직은 문헌과 고고자료를 연결시켰을 때 그 정도 추론 이상으로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솔□□□'님의 생각(http://trustle.egloos.com/1621788)은 제 개인적으로 봤을때 허술한 측면이 많습니다.

    일단, 전남 영암의 고분을 보면...영산강식 고분군 사이에서 새로 가야식 고분군이 나온 것을 기사화하고 있습니다. 이건 오히려 제가 위에서 언급한 시기에 따라 정치체의 성격이 변했거나, 발전양상 혹은 대외교섭상 주요 상대국의 변화 등으로 인한 변화로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또한, 남원의 고분군 역시 지역적, 문화적으로는 가야계지만 정치적으로는 백제계로 볼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제 청자가 위세품으로서 작용한 지역이 아직까지는 백제 이외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동시기 가야가 독자적으로 청자를 수입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으며, 가야 내부에서 청자가 위세품으로 인식되었다는 근거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역시 제가 위에서 언급한 사례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안 안좌도서의 가야계 고분 역시 학계에서는 가야와 깊은 영향이 있는 백제인의 것으로 보고 있으며, 같이 확인된 2기의 고분은 실제로 백제계임이 밝혀졌습니다. 덧붙여 장수의 고분군만 하더라도 저 정도 규모의 고분군이 조성되려면 해당 지역에 수백년간 단일한 정치체가 성장-발전해오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헌사학계에서 말하는 소위 전기가야연맹-후기가야연맹이라는 획기까지 나눠지는 가야사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삼한 시절부터 해당 지역의 토착세력으로서 존속하던 집단이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현상이 빚어진 이유는, 백제 지역에서 가야계 유적, 유물이 나왔다! 라는 사실에만 주목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백제계 혹은 기타 지역색을 띤 유적, 유물이 공반된다는 사실이죠. 그런데 그 부분을 간과하면 이처럼 얘기할 수 있는 겁니다. 이는 마치 무령왕릉에서 지석이 안 나왔을 경우, 해당 무덤을 두고 양나라의 고위관리 혹은 지방유력자가 백제 한복판에 영역을 갖고 있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지금은 폐기된) 자체가 제가 볼때는 이러한 역사적 정황과 사실을 거꾸로 해석한 소지가 크기 떄문에 '솔-'님의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는데 적절하게 쓸 수 있을 듯 합니다. 우리는 대형 전방후원분이 일본에 있고, 그보다 작은 중소형급이 우리나라에 있으므로 이를 두고 일본계 세력이 한반도로 진출했다고 봅니다. 이를 두고 임나일본부설이 맞네, 틀리네~하고 있는 실정이고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방후원분이 출현하기 전과 출현했을 당시의 일본은 동시기 한반도의 대형 횡혈식석실분이 축조되던 시기와 비교했을때 문화적으로 후진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형 전방후원분이 빵 터지고, 나중에 그것이 축소되어 한반도에서 확인되죠. 오히려 외부에서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거나 그렇게 유입된 외부문화가 토착문화를 압도했을때 이처럼 거대한 가시적 상징물이 축조된다는 것은 인류사에서 쉽게 확인되는 것입니다. 신라에 갑자기 등장했다 사라지는 적석목곽분, 한강유역에 갑자기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고구려식 대형 적석총 등이 그러한 예겠죠. 그렇게 봤을때 임나일본부를 뒷받침한다고 알려져 있는 사실들은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좀 간단히 말해서...제가 보는 5세기 이후의 백제와 가야, 신라의 상황은 마치 50여개국이 존재했다는 삼한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기존에는 50여개국이었지만, 나중에는 서울, 화성, 공주, 연기, 천안, 청주, 나주(백제계), 영암, 장수, 함안, 고령, 김해(가야계), 경주, 상주(신라계) 등으로 어느 정도 통합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러한 상황에서 철저하게 영역국가 혹은 왕국의 길을 걸었던 신라와 달리, 백제와 가야의 정치적 관계는 상당히 유동적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위의 기사들, 그리고 이번 장수지역의 상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변부에서는 끊임없이 정치적 관계가 상황에 따라 변해갔으니까 말이죠. 즉, 백제사를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상입니다.
  • 2011/12/09 11:1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12/09 11:34 #

    아아...그 반대입니다.

    - 문화적-정치적으로 더 발전된 한반도에 전방후원분이 없을 시기에, 갑자기 일본에서는 그러한 새로운 문화의 유입 결과로 보이는 초대형 전방후원분이 생긴다. 그러다가 이후에 중소형급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 다시 생긴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일본계 세력이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에 주목하여, 임나일본부와 연관지어 역사를 해석하는 경향이 크다. -

    이것이 기존의 시각인데...저는 그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일본에서 갑자기 전방후원분이 생겨나게 된 원인은 아무래도 외부 세력의 침투인데, 그럴만한 집단은 한반도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가야 혹은 백제계 세력이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저는 개인적으로 백제계 세력의 유입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역시 중심부가 무너진 백제의 주변부에서 지방 군벌들이 발흥한 결과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신라에 북방계 외부세력이 유입되면서 적석목곽분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묘제가 등장하고, 신라의 사회-군사적인 변화상이 감지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한반도에서 이주한 백제계 세력에 의해 전방후원분이 축조되면서, 이 새로운 외부세력은 자신들의 정당성과 권위를 상징할만한 초거대 전방후원분을 만들죠. 그리고 이러한 전방후원분 체제는 이후 일본 내 정치적 위계를 나누는 기준이 됩니다(전방후원분이 최상위, 전방후방분, 원분, 방분 등이 그 하위인 식으로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전방후원분이 일본에서 엄청나게 축조되고 발달된 이후에 한반도에 그보다 작은 것들이 생겨난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이것을 두고 이미 일본 내에서 안정적으로 권력을 향유하던 집단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시 한반도 내로 유입된 것이라 봅니다. 이 역시 중심부가 무너진 백제의 주변부가 발흥하는 상황과 연결시켜서 이해해야 한다고 보고 있고요.

    아무래도 권력의 핵이 사라지면 정치적 공백지가 생기기 마련이고, 그틈 사이로 다시 무엇인가가 채워지겠죠. 저는 영산강 일대에 옹관묘가 점차 발전하여 거대화하는 상황과 맞물려 영산강 유역의 변두리, 즉 해안가를 따라 왜계 문화라고 하는 것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미 한반도에서 한번 건너가 일본 열도 내에서 1차적으로 안정적인 권력구도를 형성한 집단이 본토의 정치적 공백을 틈타 다시 한반도로 건너와 나름의 영역을 확보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요. 그렇지 않고서는 한반도에 뒤늦은 시기에 갑자기 전방후원분이 등장할만한 이유를 설명하기는 힘들 듯 합니다.

    아시다시피, 당시 백제 문화권 내의 사회 발전도를 나눠본다면 아무래도 한성백제계 집단이 주축이 되어 형성한 공주-부여의 문화가 가장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말입니다. 즉, 영산강세력이나 연기, 천안, 청주, 기타 가야계 집단 등은 중심부의 경험이 없는 주변부의 발흥세력이라는 의미입니다. 뭐 어디까지나 이런 것들은 제 개인적인 추론이고, 제 전공이 백제-가야사가 아니다 보니 이것들을 논문으로 작성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됩니다. 위에서 죽 얘기한 것처럼 백제-가야사를 연구하려면 각 소국(혹은 집단)마다 토기나 고분, 각종 사회-문화적 현상이 다르기 떄문에 고구려나 신라와는 공부하는 방향이나 분량 등이 훨씬 많을 것 같거든요. ^^;;;

    암튼,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 2011/12/09 11:4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12/09 11:50 #

    아~네, 님 덕분에 저도 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

    오늘 하루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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