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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의 위치와 위만조선 중심부의 위치 상고사

얼마전 문득, 그야말로 문득 든 생각이 하나 있었다.

위만조선을 정복한
이 과연 한 군현을 그 나라의 중심지에 설치하였을까? 꼭 그럴 이유가 있었을까? 물론 타국을 점령하고 그 나라의 중심부에 새로운 통치 거점을 두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다. 일제강점기때 일제가 서울 한복판에 통감부를 두고 조선 왕실을 핍박했던 것처럼.

그런데 고대사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은 은 동녕부, 쌍성총관부 등의 영토를 따로이 관리한 바 있었으며(물론 고려인 스스로 반란을 일으켜 고려에서 몽골로 주인을 바꾼 케이스이므로 원이 고려의 영토를 임의로 구획해 통치거점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탐라총관부의 경우 원의 필요성에 의해 따로이 관리하기도 하였다(이는 앞의 두 케이스와 분명히 다르다). 그렇게 봤을때 분명 '고려' 조정은 개경에 있었고, 그 곳에서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외척 이 됐든, 원에서 파견한 사신이 됐든, 다루가치가 됐든~)이 진행되었으며, 그말인즉슨 고려를 통치(?)하는 원의 통치거점은 개경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는 각각의 이유에 의해서 원의 관리를 따로 받았으며, 고려의 영토가 분명한 제주도는 탐라총관부가 설치되어 원의 관리를 따로 받았다. , 어떤 나라가 타국을 점령했을 때, 점령국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통치거점은 여럿을 둘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에서 시작된 의문은 결국 위만조선 시절 설치되었다는 한 군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에도 은 그 영토의 중심부에 각각 도호부를 뒀다가, 군사적인 이유(신라의 백제 영토 맹공과 고구려 토착세력의 반발, 토번과의 대비천전투에서의 대패 등)와 경제적인 이유(중심지에서 먼 지역의 불안정한 식민지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 정치적인 이유(일단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책임감의 완수?, 이제 그 땅은 볼일 없다는 식?) 등으로 점점 자국의 중심지 쪽으로 도호부를 옮겨가거나 철폐해갔다. 다만, 그 과정에서 각국의 주요 인사들을 비롯해 엄청난 수의 주민들과 각종 국가의 재원을 자국으로 옮겨갔지만 말이다. 이는 고구려가 북연의 화룡성을 점거했을 때나, 전연이 환도성을 공략했을 때에도 벌어졌던 것과 같은 상황이다., 타국을 점령해서 계속 주둔하면서 영토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전쟁 비용을 상쇄시킬 수 있는 재원을 확보해서 이문을 남기는 장사를 해야할 테고, 그렇지 않다면 어떤 식으로 점령지를 관리할지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역대 중국 왕조가 북방의 흉노를 함부로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 했던 것은 그들이 공격하면 도망가고, 물러서면 툭툭 건드리며 짜증나게 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다(마치 페르시아가 바라보는 스키타이족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무제의 흉노 정벌은 진시황대의 흉노 정벌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끊임없는 팽창정책을 일관해온 이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에 한반도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시키지 못 하자 이내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古土를 차지한다.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판은 새롭게 재편된다.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던 고구려를 깨부수기 위해서 당은 무리하게 군사비를 지출했고, 그 결과 고구려를 분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고구려를 완전하게 영역화해서 지배하지는 못 했다. 이는 백제도 마찬가지였다(상대적으로 고구려보다는 더 잘 관리해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토번과의 대결(대비천전투에서의 대패도 한몫 작용했을 듯), 무리한 군사작전의 후폭풍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당은 철수하게 돼고, 그 공백지를 채운 것이 바로 통일신라와 발해다. 그러나 그 둘은 이전 시기 존재했던 고구려와 달리 독자적인 천하관을 꾸리고 중원 왕조와 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의 천하 속에 적절하게 녹아들어 자신들 나름의 나와바리를 꾸리는데 주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 역시 그처럼 변화한 상황 속에서 더 이상 무리하게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할 필요를 느끼지 못 했을 것이다. 어차피 동방에서 더 이상 고구려같은 녀석이 다시금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을테니 말이다.

그럼 당시 위만조선을 정복한 이후의 한은 어떠했을까? 계속 그곳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아님 유지하기 어려웠을까?

일단 관련 문헌이 많지 않아 전후 처리 과정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조선계 인물 몇명의 인사처리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일단 위만조선 멸망 후 설치된 한군현이 현지의 적잖은 반발을 받았던 것 같긴 하다. 몇몇 군현은 이동하고, 통폐합되기도 하고, 결국 온전히 살아남은 녀석은 낙랑군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최근에는 그 구성원들과 낙랑군의 성격을 여타 한대 군현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많다. 오히려 그 구성원은 위만조선 당시부터 살았던 조선인이며, 굳이 구분한다면 낙랑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뭐 다 좋다. 낙랑군이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부분이든, 아니든 어쨌든 낙랑군이 존재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그러한 낙랑군이 한국사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물론 과거처럼 절대적이라는 인식은 지양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필자는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그냥 의문이 들었다.

만약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위만조선을 고려처럼 관리했었다면? 어차피 위만조선의 도성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며, 위만조선의 중심부를 가늠할만한 고고자료는 쉽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과의 전쟁 상황을 살펴본다면 위만조선은 분명 서쪽으로 강으로 이뤄진 천연국경이 있었으며(태자가 한으로 들어가려다가 말았으니), 그곳에 주둔하는 부대도 있었다. 하지만 한과의 전쟁 과정을 살펴보면 고-수, 고-당 전쟁때 요하 혹은 천산산맥에서 벌어진 것처럼 국경에서의 전쟁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광석화처럼 발해 중심부를 거꾸러뜨린 거란이나, 한양까지 한걸음에 내달아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 같은 느낌(?)도 나지 않는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주요 격전지는 위만조선의 도성인 왕검성이었다. 그것도 무려 1년여나 전쟁이 지속될 정도로 왕검성은 철옹성에 가까웠던 것 같고. 그런데 그런 대단한 성곽이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지?? 로마가 카르타고를 완전히 짓밟은 것처럼 한도 위만조선의 재기 의지를 완전히 꺾기 위해 왕검성을 완전히 허물었을까? (그랬다면 기록에 있었겠지) 즉, 위만조선의 중심부와 주변부에 대한 정확한 문헌-고고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반드시 한사군은 위만조선의 중심부에 설치한 한의 군현이다...라고 봐야만 하는지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평양의 지리적 위치는 분명히 이를 거점으로 삼아 한반도-일본 등지를 관통하는 교통로를 장악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이다. 육로와 수로 어느 곳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으며, 평탄한 지세와 산지 등이 적절히 어우러진 곳이기도 하다. 혹시 한은 원이 제주도를 탐라총관부로 만든 것처럼, 평양 일대를 주목해 그곳에 낙랑군을 설치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이는 낙랑군만이 이후 수백년간 존속할 수 있었던 것만 봐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오히려 군현을 설치한 중원왕조는 계속 사라지는데도 어떻게 군현은 수백년간 존재할 수 있을까? 페니키아의 식민지로 출발한 카르타고나, 한반도 이주민의 이주처로 시작한 왜가 종래에는 원주지(고향?)보다 더 강력해진 것처럼 낙랑군이 그렇게 성장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실제 북한의 문화지리적인 현상을 보면 대동강이 아닌 청천강이 문화적 경계로 작용하고 있다(선사시대부터 지속되어 온 현상). 살수가 역사상 몇차례 등장하며 중요한 의미를 내보인 것도 이와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봤을때 위만조선의 중심부가 대동강을 중심으로 하는 평양 일대라면 청천강 이북은 위만조선의 중심부와 문화가 다른 주변부(고대에서는 지금보다 더 중심부와 주변부의 문화적 격차가 컸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로 봐야 하는데, 아직 위만조선을 연구하는데 있어 중심부-주변부라는 개념을 적용하기에 턱없이 자료가 부족하기도 하고. 그렇게 봤을때 오히려 청천강 이북 어딘가에 위만조선의 중심부가 있었고, 그 중심부가 와해된 가운데 한군현이 설치된 위만조선의 주변부인 평양 일대는 개발되고 재조명되어 훗날 중요하게 부각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냥 문득 든 생각이라 글이 두서도 없고, 정리도 안 되어 있다. 그냥 필자의 생각에 도움될만한 이야기들을 해주시면 좋을 듯 싶다. 아무거라도~^^


핑백

  • Warfare Archaeology : 위만조선과 한의 전쟁 및 왕험성의 위치 2015-07-28 09:59:44 #

    ... 긋고 가볍게 얘기하는 수준) 등은 그닥 설득력이 떨어지는 듯 싶다. 이에 대해서는 예전에 위만조선의 중심지가 지금의 평양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 쓴 포스팅(클릭)이 있긴 하지만, 위만조선의 도성이 갑자기 발견되지 않는 이상, 현재 학계의 대세를 따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나 싶다. ---------------- ... more

덧글

  • Warfare Archaeology 2012/04/27 18:00 # 답글

    당장 강인욱 선생님의 얘기를 들어봐도 '고조선이 흉노의 왼팔이다'와 같은 표현도 아마 군사적-정치적으로 고조선이 강력해서 위협이 되었다기 보다는 경제적으로 고조선이 흉노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존재가 아닌가~하는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예전에 고조선의 모피 교역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아마 그것과 연결지어 이해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봤을때 과연 고조선이 수-당에게 있어 고구려만큼, 한에게 있어 큰 위협이 되었을까? 오히려 한은 고조선의 그런 경제적인 가치에 더 주목했고, 이후 낙랑군을 설치해 운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 레드피쉬 2012/04/27 18:09 # 답글

    맛집포스팅도 자주 해주세요ㅎ
  • Warfare Archaeology 2012/04/27 18:09 #

    휴우 그러게요...바빠서 요새 아주 소홀했습니다. 쩝...-.-;;
  • 레드피쉬 2012/04/27 18:10 #

    ㅎ다른글은 읽기는 다는데 덧글달기가 어려워요ㅎㅎ

  • Warfare Archaeology 2012/04/27 19:52 #

    ㅋㅋㅋㅋ 넘 부담갖지는 마셔요. ^^ ㅋㅋㅋ
  • nhyy 2012/04/27 18:18 # 삭제 답글

    낙랑군이 부끄러운 역사다 뭐다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요서 지역의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멸망도 아니고 그냥 자멸하자 한나라가 요서 국경 변방에 설치한 것인데 그런 것 자체를 신경쓰는것이 식민사학적입니다.
    전혀 우리 역사에 영향을 주지못한 변방에서 벌어진 신경쓸 가치도 없는 일을 가지고 무슨 평양에 설치돼서 짱개가 우리를 식민지배했다고 사기치고 구라쳐서 열등감을 심어주려는 식민사학의 사기극이죠.
    임나일본부와 한배에서 나온 개새x죠.(한배애서 나온..은 랭보의 유명한 표현이지 욕이 아닙니다.)
    이딴 사기극을 추종하는 것들이 바로 식민빠죠.
    아 물론 님보고 식민빠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하여간 없는 역사를 가지고 스스로 열등감에 빠져서 자학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세요.
    상당히 우습습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2/04/27 19:53 #

    음...그런 접근 방법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낙랑군은 아직 밝혀져야 할 부분이 더 많습니다.
  • 리얼스나이퍼 2012/04/27 18:28 # 답글

    평양에는 왕검성같은 험한 지형에 의지해서 철옹성을 구축할 만한 지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왕검성=평양설 자체가 완전 거짓말이고 나아가 낙랑군=평양설 자체도 완전 허구라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할텐데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진실이양 생각하고 이렇게 빙빙 둘러서 거짓말을 사실인양 합리화하려고 꿰맞추시는지 참 답답하시네요.
  • Warfare Archaeology 2012/04/27 19:54 #

    그럼...왕검성같은 철옹성이 요서나 다른 지역에 구축될만한 지형은 있습니까? 그도 마찬가지인데요. ^^
    뭐가 사실이고, 거짓인지는 오직 물질자료가 증명해주겠죠. 전 그게 나올때까지 보류하는 거고요.
  • 리얼스나이퍼 2012/04/27 20:11 #

    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1/02/12201712.jpg

    갈석산에서 바라본 창려현 창려현은 기록에 고조선의 도읍으로 나오는 곳이다. 사기의 “위만은 왕검(王険)으로 도읍을 삼았다”라는 기록에 대한 주석으로 후한의 서광(徐広)은 “창려현에 험독현이 있었다”, 응소(應劭)는 “요동 험독현은 조선의 옛 도읍”이라고 했다. ‘왕검=험독’임을 설명한다. 이 지역은 현재 베이징에서 멀지 않다. 연나라의 침입으로 상실한 이후 진한 교체기에 고조선이 재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멀리서 봐도 천연 요지임을 알 수 있다. 멀리 발해가 보인다.2 란하 고조선의 도읍지인 창려를 끼고 흐르는 강이다. 3 고조선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비파형동검. [사진=권태균]
  • Warfare Archaeology 2012/04/30 03:36 #

    리얼 스나이퍼님, 일단 사진 잘 봤습니다. ^^

    문헌에는 제가 밝지 않아 중국 문헌을 자세히 고증하기는 힘들지만...리얼 스나이퍼님이 쓰셨다시피 '연나라의 침입으로 상실한 이후 진한 교체기에 고조선이 재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하신 것처럼 그런 추정에 근거해서 일국의 역사를 정리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문헌사학자들은 문헌에 그런 것들을 추정할만한 정황근거가 있으니 그렇게 하실 수도 있겠으나, 고고자료를 다루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쉽게 그렇게 얘기하기 힘듭니다. 제 상황도 좀 고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 근처에서 고조선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이 나오면 가장 좋겠으나, 일단은 위만조선의 도읍부터 찾을라는 건 너무 성급한 것 같습니다. 최근 강인욱 선생님의 고조선 모피교역 관련 논문이나, 정인성 · 오강원 선생님의 낙랑 관련 연구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차근차근 하나씩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비파형동검의 출토지만 갖고 고조선의 영역을 말하는 접근법은 무의미한 것이 사실이니깐요. 아시겠지만 비파형동검은 유물, 즉 움직일 수 있는 동산입니다. 꼭 출토지가 그걸 만든 집단의 영역이라는 인식은 금물입니다.

    이상입니다. ^^
  • 2012/04/27 18:3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2/04/27 19:55 #

    흠. 저는 그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에 의문이 있는 겁니다.
    그걸 증명할만한 고고자료는 제가 알기에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문헌적으로 가능하다고 하셨는데...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문헌 쪽은 제가 좀 취약해서요.
  • Warfare Archaeology 2012/05/02 19:53 #

    아! 혹시 제 포스팅이 마치 낙랑재평양설을 부정하는 포스팅으로 오해할만한 건가요?
    흐음. 그냥 저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자~고 간단히 적은 것 뿐인데...
    문헌적인 근거는 기존에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좀 Pass하고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관련 포스팅은 잘 읽어봤고 무슨 내용인지 아니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저도 일단은 낙랑군 내부 어디에 위만조선의 도성이 있겠거니~싶은데...
    야스페르츠님 포스팅을 보고 제가 가진 의문이 그냥 허황된 것만은 아니구나~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물론 왕험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는 없구요~~^^
  • 굔군 2012/05/02 21:51 #

    아, 아닙니다. 저도 워페어 님의 의문 제기 자체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왕험성의 위치를 평양으로 단정하려는 것은 아니며, 다만 여러 모로 따져봤을 때 대동강 북안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이지, 딱히 워페어 님의 글에 대한 논박으로 그 포스팅을 작성한 것은 아닙니다(사실 제가 논박한 상대는 따로 있었죠).

    제 어조가 워낙 공격적이라 오해하신 듯하네요. ^^;
    원래 제가 글 쓰는 스타일이 좀 그렇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2/05/02 22:42 #

    ㅎㅎ 그건 알고 있습니다. 누군지...
    어조가 공격적이거나 그런게 아니라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댓글 남겨봤습니다. ^^
  • 구데리안 2012/04/27 18:44 # 답글

    한서가 번역된게 있으면 좋을거 같은데.. 일단 확인해봐야할것은.

    1. 당시 한나라의 이민족 토벌후의 성곽이나, 구조물 건축 내지는 재활용을 따로 한 사례가 있는자 여부 확인( 고조선 외의 사례 확인, 고조선만 특별히 따로 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됨. 흉뇨가 주적화 되긴 했지만.)

    2. 강의 유무라는건 국경일수도 있지만, 일종의 중립지대를 건넌 뒤의 일이 될수 있다는 점도 고려(지금 처럼 국경이 아닌 일종의 변경 개념이 통용되는 시기일수도 있음)

    3.고조선 멸망후의 전쟁의 원인이기도 한 삼한 지역의 예물 오는 길의 유무 여부(해로로 통해 오는건지 육로로 통해 오는건지)

    4.고구려의 낙랑 문화의 영향 유무

    대략 선입견을 가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우선적으로 생각해야할건 이정도라고 생각합니다만.
  • Warfare Archaeology 2012/04/27 20:00 #

    1. 좋은 접근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번 찾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2. 이 역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국경보다 더 바깥쪽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겠죠. 흠...

    3. 교통로 자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뤄지고 있고, 저도 그에 크게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만...그게 과연 맞는지...를 검증할만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 이런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과연 한이 위만조선의 중심지가 아닌데도, 굳이 평양 일대를 선택한 이유! 혹은 위만조선 시절에도 평양 일대가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등등을 알 수 있을만한 자료가 있을지...흐음.

    4. 이건 뭐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고구려의 영역 확장에 낙랑 세력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니...이 부분은 위만조선과의 연관성을 살펴보는데 크게 고려할만한 사항은 아닌 듯 합니다.

    암튼...왕검성을 증명할만한 고고자료가 없다면...쩝...어렵네요~
  • 원더바 2012/04/27 18:52 # 답글

    고려와는 다른게, 고려는 조정이 존재하면서 부마국인거고 고조선은 아예 멸망시킨 것이었을테니까요...
  • Warfare Archaeology 2012/04/27 20:00 #

    하긴 그건 그렇죠. 고려는 살아남았고 고조선은 없어졌으니. 흐음~~
    나라가 멸망한 다음에 기존 치소 이외에 식민지 치소를 세우는 사례가 더 없나 찾아봐야겠습니다. 쩝~
  • 야스페르츠 2012/04/27 20:53 # 답글

    《사기》 〈서남이열전〉을 보자면, 공족의 수도에 월수군, 작족의 수도에 침리군을 두었고, 염족과 방족을 합쳐서 민산군, 그리고 백마에 무도군을 설치했네요. 공과 작은 都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염, 방, 백마의 경우는 都라는 언급은 없습니다. 〈남월열전〉에는 단순히 9군을 설치했다고만 언급하고 있지만 그에 앞서 남월을 평정한 뒤 설치했다고 합니다. 〈동월열전〉에는 백성들만 옮기고 땅은 버렸다고 하네요.
  • Warfare Archaeology 2012/04/30 03:45 #

    앗! 관련 기록을 싹 찾아서 정리해주셨군요. 감사감사~^^

    『사기』나『한서』에도 마찬가지로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고만 나와 있는데, 이는 남월과 비슷한 기록입니다. 흠. 남월 지역에 설치한 9군의 흔적이 남아 있나 한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공족의 수도와 작족의 수도에 각각 군을 두었다고 하니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흐음. 이 생각을 왜 미리 못 했지? 혹시 남월 지역에 설치했다는 9군의 위치가 남월의 도읍 지역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있으시다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

    암튼, 이건 중국에 있는 후배한테 논문이나 자료를 좀 찾아달라고 부탁해봐야 겠습니다.
  • 2012/04/28 04:2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2/04/30 04:05 #

    하긴 그도 그렇습니다. 너무 단선적으로만 당시 상황을 본 것도 있네요. 말씀대로 당시 전황을 알려줄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으므로 그걸 너무 간단하게 위만조선의 국력과 연결시킬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변수가 많은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더더욱 말이죠. 그럼 일단 전쟁 기록으로 고조선의 국력을 언급하는 것은 일단 배제하고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투가 어디서 벌어졌는지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물론 몇차례의 전투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투의 양상은 한이 동시기 흉노와 벌였던 것과 분명 다르며(적어도 위만조선이 평지 초원에서 흉노처럼 살지는 않았다는 의미가 되겠네요), 후대 고구려가 수-당과 벌인 전쟁 양상과도 다릅니다(각지에 성을 건설해 그곳이 정치-경제-군사의 중심지로 활용된 것도 아닌 듯 합니다). 그렇다고 국경도 없고, 그 영역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그렇게 적었던 정치체는 또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게 봤을때 왕험성에서의 몇달 혹은 약 1년 가량의 공성전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왕험성에서의 전투가 위만조선의 국력과 직결시키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얘기하기 위해서는 좀 더 정밀하게 접근할 필요성이 있을 듯 싶습니다.

    그렇지만 대세론을 그대로 따르는 것도 무리는 있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문헌자료 어디에도 왕험성이 평양 일대여야만 한다는 것은 없어 보이는게 사실입니다. 솔직히...정황 근거는 되겠지만요. 초원 4년 호구부에 적힌 것처럼 낙랑군 조선현의 압도적인 인구를 많이들 이야기 하시는데, 그건 말 그대로 '낙랑군 조선현의 인구가 그만큼 있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낙랑군 조선현의 인구가 그만큼 있었으니 거기가 위만조선의 도성이었고, 그러니깐 사람이 많이 살았다...를 의미하는 직접적인 근거는 아니니깐요. ^^

    아시겠지만 과거에는 한강유역이 백제의 중심지이자 도성이라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만 최근 고고자료를 보면 백제 각지에서 그에 준하는 지방 수장층의 존재를 알리는 고분유적들이 쏟아지고 있지요. 백제가 주도적인 정치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중심부에 준하는 주변부의 지방 거점들이 존재했다는 것 또한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 포스팅을 썼을때의 의문도 그것이었습니다. 지금은 평양 일대의 낙랑 관련 유적만 자세히 알려지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그런 지방 거점이 밝혀질지 모르는 일이니 너무 선입견을 갖고 역사를 재단하는 것을 한번 재고해보는 것은 어떤가~였던 겁니다.

    시중에 고조선-위만조선 관련 서적은 정말 많은데 거기에서 눈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고조선-위만조선의 실증자료만 추려내면 책 1권 분량도 안 나온다는 것을 알았을때 정말 궁금했죠. 이 책을 쓴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구나~어떻게 이렇게 양을 불려서 책을 쓰지, 불확실한 정보들을 취합해서 말이죠. 위만조선의 도성유적, 중심부와 주변부를 알려줄만한 차이있는 문화양상, 위만조선의 토기, 위만조선의 철기, 위만조선의 주거지와 사람들의 삶, 위만조선의 경제양상, 위만조선의 영역권과 국경 등등 우리가 모르는 것 투성이가 바로 위만조선입니다. 우리가 그나마 자세히 알고 있는건 멸망 이후 위만조선 영토 어딘가에 설치된 낙랑군의 흔적들 뿐이죠.

    언젠가 북한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활발해지면 우리가 국사책에서 봤던 4가지 색깔로 채색된 한사군의 영역이나 범위가 수정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가 모르는게 너무 많으니깐요. ^^
  • 2012/04/30 07:1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2/04/30 12:01 #

    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일단, 왕험성이 과연 철옹성일까? 하는 부분은 저도 말씀대로 고려하고자 합니다. 전쟁은 변수가 많은 인간의 활동이기 때문에 너무 단선적으로 볼 필요도 없을 듯 하고요.

    그 다음에 청천강 이북에 대한 부분. 일단 평양 이외에 장기간 도읍으로 삼을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하고 봤더니 딱히 보이지는 않더군요. 혹자는 물 밑에 가라앉았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그럴까? 싶긴 합니다. 과거에 바다였던 곳이 오히려 요즘은 다 내륙으로 들어와 있는 상황을 보면 과거에 해안 혹은 하안을 끼고 있던 곳도 오히려 지금은 상당히 내륙으로 들어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게 봤을때 통설대로 평양에 위만조선(고조선까지는 몰라도)의 도읍인 왕험성이 있었다는 것에 정밀한 논리를 갖고 반박할 수는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궁실 유적이 나오거나, 기타 유적들에서 연대측정이 이뤄지거나, 다량의 토기가 출토되어 이를 토대로 교차편년이 가능해지거나, 금석문 등이 나와야 하겠죠. 맞습니다. 제가 봤을때 그 정도가 나와야 고고학쪽에서는 뭔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정황증거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황증거만 갖고 얘기할 수 없는 학문적 특성을 이야기하는 것 뿐입니다. 문헌사학자들과는 달리 말이죠. 더불어 고고자료가 나와도 문헌에 억지로 끼워맞추다 보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특히 몇몇 문헌사학자들은 실제 지금 그러고 있고, 비판받고 있지만 수정하지 않죠), 같이 가는 것에는 저도 동의하지만 우선권을 주자면 고고자료가 먼저 가야 한다는 쪽입니다. 특히 고대사 분야임에도 문헌 기록이 중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봤을때 말이죠.

    암튼...기존의 선학들이 쌓아놓은 통설의 금자탑을 일순간에 뿌리부터 흔들 생각은 없습니다. 저도 어차피 전공자가 아니고, 상고사쪽은 공부가 정밀하지도 않으니깐요. 다만, 고고학계도 이제는 자료가 없으니 입을 다물자가 아니고, 보다 적극적으로 접근해야만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통설을 그대로 따르기 보다는 처음부터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은 어떨까~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입니다. ○○○님께서 비전공자이니깐 참고만 해달라고 하시는 것처럼, 저 역시 이 분야에 있어서는 비전공자니깐 그냥 제 생각이 이렇다~라고 적은 것 뿐입니다(뭐 나중에는 관련해서 공부를 할 지도 모르겠지만요. ^^;).

    그래서 저는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경향이 마음에 듭니다. 문헌사학자들이 고고자료 몇점(유구는 없으니 유물만 갖고)으로 고조선의 영역을 지도에 그려내는 식이 아닌, 인류학-고고학적 접근법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낙랑토기 등에 대한 일제강점기때 연구를 재해석하는 등 이전보다 적극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니 말이죠. 처음부터 고조선-위만조선의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주변부부터 중심부로 접근하는 것이 일단은 맞다고 봅니다. 낙랑군에 대한 보다 정밀한 연구가 대표적일 듯 싶네요.

    마지막으로...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면 저야 당연 감사하죠. 그런 토론을 하려고 블로그를 만든 건데요. 그러니 앞으로도 제 포스팅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든 다 제게는 좋은 것이요, 고마운 것이니깐요. 포스팅 관련해서 남겨주신 댓글 모두 감사합니다. ^^
  • 마에스트로 2012/05/01 16:33 # 답글

    지난번 굔군 님이 포스팅해 주신대로 평양 지역에 조선현을 설치한 것도 약간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왜 평양에 조선현을 설치했는지 볼 때 이곳이 왕검성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또한 수륙 양동 작전을 펼치려면 평양만큼 적격인 장소가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2/05/01 21:10 #

    저도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평양 지역에 조선현을 설치한 것 등의 문헌자료가 있지만, 미심쩍은 부분도 있기 때문에 달리 생각하면 어떨까~싶었던 겁니다. ^^

    아! 그리고 평양에 대해서, 수륙양동작전을 벌이기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데에도 일단은 저도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다만, 한반도 북서해안과 중국 동북 해안의 지형변화가 적지 않았던만큼, 과거 평양의 지형이 어떠했을까? 혹은 다른 곳이 후보지로 선택될 가능성은 없을까? 에 대한 궁금증도 있고요. ^^ 이 부분은 어차피 저도 공부하는 분야와 비슷해서 한번 찾아봐야지, 찾아봐야지 하면서 여태 못 찾아봤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 마에스트로 2012/05/02 00:38 #

    그런데 전쟁 상황이 주로 패수나 왕검성에서만 벌어지는데 이건 어떻게 보아야 할지....
  • Warfare Archaeology 2012/05/02 19:32 #

    일단 제 개인적으로 지리 비정에 능통하지 못 합니다. 기존의 지리 비정을 비판없이 100% 수용하는 것에도 약간 거부감이 있고요.

    어쨌든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기존의 선학들이 언급한 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 그곳이 청천강일지, 대동강일지, 아니면 서북한의 다른 강일지, 다른 지역의 강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거기다가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 지역이라는 것 또한 고고자료로 증명된 것이 아닌지라 제 입장에서는 그냥 '그런 주장이 대세구나~' 정도로밖에 안 와닿습니다. 만약 제가 고조선-위만조선 전공자라면 이에 대해서 어떻게든 해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겠지만...그럴만한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럴만한 공력을 들일 주제도 아닌 것 같고요.

    패수와 왕검성이 지금의 청천강과 평양이다...라는 확실한 고고학적 근거만 있다면야 제가 못 믿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
  • Warfare Archaeology 2012/05/02 19:41 #

    아! 그리고 굔군님의 포스팅(http://kyonkun.egloos.com/2862043)에서처럼 저 역시 저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문헌적으로 접근하면 아주 당연한 접근일테니깐요. ^^

    제 포스팅이 마치 '위만조선의 도성은 평양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라는 것처럼 비춰진 것 같은데, 전 단순히 고고자료가 없기 때문에(누구나 그렇듯이) 그게 100% 맞다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한 것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문헌사학자들이『삼국사기』나『일본서기』를 갖고 근초고왕이 4세기때 한반도 서남부 마한지역을 지배했다고 해석해 왔지만, 고고자료는 그와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후대의 문헌 해석과 고고자료는 상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문헌 해석을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면 고고자료와 일치한다고 보지만 이 역시 제 공부가 부족하므로 Pass). 그렇게 봤을때 위만조선의 도성은 평양이다~라는 당연한 생각을 당연하게 전제로 깔고 당연하게 그 다음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에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 뿐입니다.

    앞으로 북한 지역에 대해서도 발굴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그게 또 학계에 보고될 수만 있다면 분명히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사실들이 밝혀질 테니깐요. ^^
  • 마에스트로 2012/05/03 09:55 #

    물론 오늘날 평양지역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조법종 교수의 견해대로 현도군일 수도 있을 겁니다. 고고학 자료가 뒷받침해준다는 전제로 말이죠.^^ 하여간 저도 현 정설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고 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2/05/03 16:58 #

    흠. 조법종 쌤 학설은 좀...의문스럽지만...암튼 누군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죠. ^^ ㅋㅋ
  • 마에스트로 2012/05/03 21:31 #

    그냥 가능성은 열어두잔 거지요.^^ 비록 작년 부흥카페 떡밥이었지만 위만 비문이라도 출토되었으면 좋겠네요.^^
  • 2012/05/20 01:0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2/05/20 20:48 #

    흠. 글쎄요...저도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지는 않은데...
    제가 활동하면서 봐왔던 분들 중 오히려 활동성이 뜸한 측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만...
    뭔 일이 있으신지. ^^;;
  • 2012/05/20 22:2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2/05/21 02:14 #

    흐음. 무슨 포스팅이었길래...
    저도 딱히 토론(?)을 해본 적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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