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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의 용례 기타 한국사

이번에『조선왕조실록』에서 온돌 관련 자료를 검색하다가 찾은 기록들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어 잠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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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6권, 7년(1512 임신 / 명 正德 7년) 6월 1일(계묘) 2번째 기사
- 대간이 기은의 일과 안윤덕 등의 일에 대해 빨리 결정하기를 청하다

대간이 아뢰기를,

“신 등이 근래에 아뢴 기은(祈恩)의 일과 안윤덕(安潤德) · 우윤공(禹允功) · 이남재(李男才) 등의 일에 대하여, 혹은 경연(經筵)에서 면대(面對)하여 아뢰고, 혹은 연달아 예궐(詣闕)하여 아뢰었으나, 지금까지 윤허를 받지 못하여 양사(兩司)가 장차 합계(合啓)하려고 합니다. 합계하면 부득이 청납(聽納)하실 것이니, 이렇게 되면 한갓 간함을 거절한다는 소문만 나고 간함을 받아들이는 미덕은 없게 됩니다. 또 합사(合司)하게 되면 사헌부 안에 정폐(停廢)되는 일도 많을 것이니, 시급히 윤허하여 받아들이소서.” 하고,

사헌부가 또 아뢰기를, “윤여필(尹汝弼)의 일에 대하여, 어제 분부에 ‘목욕(沐浴)하는 일로 내려갔고 다른 일은 없으니, 추고(推考)할 수 없다.’고 하셨으나, 임금으로서 외척(外戚)을 대하는 도리는 비록 작은 허물이라도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작은 허물이라 하여 책하지 아니하면, 장차 큰일을 저지르면서도 교만 방종하여 꺼리는 것이 없을 것이니, 끝까지 추고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교리(校理) 김영(金瑛)은 어사(御史)로 평안도 삼화(三和) · 중화(中和) 등의 고을에 가서, 다만 갑옷[甲]에 화인(火印-낙인)이 없는 것과 궁시(弓矢)를 넣어 둔 온돌방에 비가 새어서 퇴락한 것만을 서계(書啓)하였습니다. 신하로서 왕명을 받고 나가 이와 같이 소략하게 마음을 들이지 아니하였으니 추고하시기 바라며, 우의정 성희안(成希顔)은 집에 숙석(熟石)을 사용하였으니, 추고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기은(祈恩)하는 데는 이미 목장(牧場)의 말을 쓰지 말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이 어찌 국가에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안윤덕(安潤德)은 인물이 쓸 만하니 버릴 수 없고, 김영의 일은 과연 소루하였으니 추고함이 가하다. 성희안은, 풍원위(豐原尉)의 집 담장을 헐고 그 지대석(地臺石)을 옮겨다 쓴 일로 이미 와서 피혐(避嫌)하였으니, 추고하지 말라. 우윤공 · 윤여필 · 이남재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영인본】 14책 588면


인조 26권, 10년(1632 임신 / 명 숭정(崇禎) 5년) 4월 21일(무자) 2번째 기사
- 예조에서 추숭한 대왕의 영정을 봉안하는 일을 상의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왕(大王-인조의 生父인 定遠君을 추존한 칭호)의 영정을 봉안할 곳을 정하는 일에 대해 대신과 상의하였고, 성묘(成廟) 때의 일을 상고하였습니다. 신숙주(申叔舟)의『추모록(追慕錄)』에 ‘계사년(성종 4년-1473) 가을에 사당이 완공되었다. 우의정 성봉조(成奉祖)에게 옛 사당에 가서 어진(御眞)을 모셔다가 새 사당의 후전(後殿)에 옮겨 봉안하라 하고, 신(臣) 신숙주에게 신주(神主)를 모셔다가 새 사당의 정전(正殿)에 봉안하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의묘(懿廟-德宗을 가리킴) 때의 일입니다. 또『실록』을 상고해 보건대, 을미년 10월 12일 회간 대왕(懷簡大王)을 부묘(祔廟)하고 의묘를 봉안한 절목에 ‘위판(位版)을 의묘에 봉안하고 영정과 시고책(諡誥冊)을 의묘 영전(影殿)에 봉안하도록 명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덕종의 신주는 이미 부묘하였으나 연은전(延恩殿)은 이때 아직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의묘에 위판을 봉안하게 하여 문소전(文昭殿)과 같게 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덕종의 영정은 시종 별전에 봉안되었고 제사를 지낸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 문소전의 일을 들으니, 여러 왕들의 어진을 모두 상자에 넣어서 각실의 위판 곁에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과거 제관(祭官)이었던 영의정 윤방(尹昉)의 기억으로는 대개 이러하나 역시 자세하지는 않습니다. 또 봉상시의 늙은 수복(守僕)에게서 들으니, 문소전 뒤에 선원전(璿源殿)이 있어서 선원록(璿源錄)과 어진을 모두 여기에 봉안하였다고 하나, 그말 역시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영숭전(永崇殿) 등의 어진을 모두 벽에 걸어놓고 삭망(朔望)마다 분향하며 육명일(六名日)에 제사를 지내나, 문소전과 의묘의 영정을 상자에 넣어 두는 것은 한 전각 안에서 두 번 제사지내는 것이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왕의 영정을 능원군(綾原君)의 사저에 계속해서 모셔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숭은전(崇恩殿)에 옮겨 봉안해야 하나 전내에 봉안할 곳이 없으니, 별도로 상자 하나를 만들어 영정을 넣어두고 신주를 옮기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대신(大臣) 한 사람을 보내서 책보(冊寶)를 둔 곳에 봉안하도록 하고, 본전(本殿)의 참봉으로 하여금 삭망마다 살피고 장마 때에 햇빛을 쬐게 하면 보관하는 데 손상될 염려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합당한 방법입니다. 혹 전각의 곁에 별도로 온돌을 놓고 때때로 불을 땐 후에야 장마 걱정이 없다고도 합니다. 선왕을 모시는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므로 대신도 그 가부를 결정할 수 없어서 감히 이와 같이 아룁니다.” 하니, 전각 뒤에 별도로 온돌 방을 만들어 봉안소로 삼으라고 답하였다.

【태백산사고본】【영인본】 34책 48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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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기록들을 보면 조선시대때 궁시를 보관하는 창고라든가, 왕의 영정 및 신주를 모셔두는 방을 온돌방으로 꾸몄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후자의 경우, 화재의 위험 및 온돌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을 경우 오히려 좋지 않다는 의견들이 꾸준히 보이고 있지만, 암튼 습기로부터 귀중한 것(무기와 선왕의 영정 등)을 보관하기 위해 온돌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고구려 때에도 온돌이 이런 식으로 사용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약간 들었지만, 고구려인들이 쪽구들이 아닌 방 전면을 온돌로 만들었는지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현재까지의 고고자료로만 보면 안 그랬을 확률이 더 높다) 이는 어디까지나 상상에만 머물러야 할 것 같다. 물론 방 전면에 온돌을 깔지 않아도 그 온기가 방 안을 덮힌다면 어느 정도 보온 및 난방의 효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다(한번 쪽구들과 전면 온돌방의 보온효과에 대해 비교한 논문이 있는지 찾아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덧글

  • 행인1 2012/11/27 23:05 # 답글

    앞의 사례의 경우 물소뿔과 어교(부레를 끓여 만든 접착제)를 사용한 각궁의 특성상 이를 보관하기 위해서 온돌을 이용한듯 합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2/11/27 23:07 #

    네~복합궁의 경우 저런게 필요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혹시 활시위를 보관하는 데에도 적정 온도나 습도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흐음~암튼, 그렇다면 고구려의 각궁도 이렇게 보관했을 가능성은 있을지도요??? ^^;
  • 구데리안 2012/11/27 23:11 # 답글

    진짜 골떄리는건.. 북방의 고구려나 그쪽의 인력들이 주축이 된 백제에는 온돌이 나오지만, 정작 북방을 거쳐서 온걸로 추정되는 신라에는 온돌이 아니 나온다는게 참... 어떻게 해석을 해야할지 모르겠더군여.
  • Warfare Archaeology 2012/11/27 23:41 #

    그것도 그렇네요. 신라에만 온돌이 없는게...흐음...고건 또 생각 못 했네요.
    고구려나 백제 주거지에는 확실히 노지가 확인되는 주거지도 있지만, 쪽구들과 아궁이가 확인되고 있죠. 그에 반해 신라나 통일신라 주거지는 딱히 그런게 없는 것 같기도...이거 논문 한번 뒤져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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