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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에서 자연과학분석법의 중요성을 다룬 논문 백제사

오늘『한국고고학보』88호가 발송되어 목차를 둘러보니(물론 고구려-발해 관련 논문이 뭐가 나왔나? 보기 위함이지만, 최근에 관련 논문들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풍납토성 축조연대의 고고과학적 연구-2011년 동성벽 조사결과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이 게재되어 눈길을 끌었다. 단순히(?) 출토유물의 분석에 따른 상대연대에 의존해 풍납토성의 축조연대 등을 살펴본 기존의 방식과 달리 자연과학분석을 통하여 보다 정밀하고, 다양한 정보들을 뽑아내고자 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었다. 이는 국문초록(p.42)에 보면 잘 나와있어 여기 잠깐 옮겨보도록 하겠다.
 

특히 고고학적 계기성을 사전확률모형으로 채택하는 베이지안 통계학은 고고자료의 시간적 순서(상대연대)를 자연과학적으로 뒤바꾸거나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고고자료와 공반된 연대자료를 토대로 물질문화의 변화폭보다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인간행위의 시점을 검토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고고층서학(archaeological stratigraphy)'이란, 지질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층위 형성의 계기성을 분석하는 방법으로 공반관계를 고려하여 유적의 형성과 후퇴적 과정을 이해하는데 명확하게 적용할 수 있는 상대연대결정법 중 하나라고 한다. 즉, 층서관계를 토대로 층을 결합하여 일정한 단위로 구분하고, 그 상호관계와 기능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합리적으로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해리스 매트릭스(Harris Matrix)'를 이용해 2011년 조사된 풍납토성 동성벽을 299개의 퇴적층과 성토층으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리스 매트릭스'는 크게 어려운 개념은 아니다. 위에 링크된 화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떤 퇴적층과 거기에서 확인되는 후대의 인간행위, 그리고 그 후의 후퇴적과정 등을 층서적으로 구분한 뒤(칼라풀한 이미지와 각 토층간 매겨진 번호, 그리고 각 번호마다 어떻게 다른 토양인지 설명된 내용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각각의 퇴적층을 퇴적 순서에 따라 순서배열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맨 아래 11번 위로 9-8-7-1번, 10-4번의 순으로 토양이 퇴적되는 것을 모식도로 표현한 것이다). 즉, 이러한 토양 퇴적 순서를 통해 해당 구조물(주로 성벽이나 제방과 같은 토축 혹은 토석혼축 건축물들)의 축조기법을 확인할 수 있고, 유물이 출토된 토층을 통해 유물의 상대편년, 더 나아가 유물을 통한 유적의 편년까지도 가능한 방법이다. 이번 학보에서는 논문으로 작성돼 소개하고 있지만, 이미 몇몇 발굴조사보고서의 고찰 부분에는 이러한 해리스 매트릭스를 이용한 층위 해석 결과가 소개되고 있는만큼, 이 논문의 내용 자체가 참신하거나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돌아와서 논자(3명)들은 풍납토성 동성벽의 299개 토층을 해리스 매트릭스로 정리하였고, 그 결과 총 4단계로 구분하였다. 1단계는 기초공사가 이뤄진 단계로 구지표면과 성토층으로 세분하였고, 2단계는 초축성벽, 3단계는 증축성벽, 4단계는 최종성벽 구간으로 구분이 가능하였다. 이후 3D 스캔하여 입체화한 성벽 단면의 도면을 제시하고, 각 단계별 토층에서 출토된 유물의 분석(제작기법, 형식분류 등)을 통하여 각 단계를 상대편년 결과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성토층 내에서 수습한 유기물자료들은 미국의 '베타연구소', 영국의 '스코틀랜드 대학연합 환경연구센터'에 의뢰하여 14C 연대측정을 실시하고, 한국의 '(주)네오시스코리아 방사선응용연구센터'에서 OSL 연대측정 및 베이지안 통계학 검증을 실시하는 등 보다 정밀한 자연과학분석 결과를 얻기 위해 다양한 분석을 실시하였다.
 

여기에서 잠깐 '베이지안 통계학(클릭)'에 대해 정리해보겠다(필자도 정확하게 개념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방법은 모수를 미지의 고정된 값이 아니라 확률적 규칙의 지배를 받는 '변수'로 취급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즉, 모수에 대한 사전분포(prior distribution)와 자료의 정보를 혼합하여 사후분포(posterior distribution)를 구한다는 것이 핵심인데, 문제는 모수에 대한 사전정보가 분석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시료의 생성과정 및 선후관계(앞서 살펴봤던 유물 자체의 분석과 분류, 그에 따른 상대편년)와 같은 고고학적 맥락을 사전확률로 선택하여 연대정보의 정밀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보다 정확한 사후분포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논자들은 통계학적으로 생성된 복수의 연대자료를 직관적인 순서에 적합하도록 배열하거나, 의도에 맞도록 취사선택하여 활용하는 소위 논리적인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해리스 매트릭스를 통한 토층 분석 및 출토유물을 통한 상대편년, 성토층 내 유기물을 시료로 한 14C 연대측정, 베이지안 통계학에 기초한 분석 등을 통하여 논자들은 각 단계별 착공시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1단계 - A.D 250~320년
2단계 - A.D 310~370년
3단계 - A.D 340~395년
4단계 - A.D 375~460년

이를 보면 풍납토성 초축 동성벽은 3세기 중후반~4세기 초반의 어느 시점에 착공되어 늦어도 4세기 중반 이전에 완공되었으며, 이후 4세기 중후반과 5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하는 2번의 증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단계의 구지표면에서 출토된 기와를 통해, 동성벽이 착공되기 이전에 이미 기와를 사용하는 건축물 또는 시설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2단계에서 성벽을 1차 축조한 이후, 3단계에서는 성벽의 내부를 덧쌓아 성벽을 더 크고 넓고 튼튼하게 보강하였는데, 이는 외벽으로도 증축을 하게 되면 성 바깥의 해자를 메우고 다시 그 너머에 재설치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상의 결과는 1999년 동성벽 구간을 조사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B.C 1세기~A.D 2세기에 중심토루를 포함한 초추겅벽의 축조가 마무리되고, A.D 2세기 전반~3세기 중반 모든 축조가 완료되었다고 보고한 것과는 다른 결과로서, 일단 풍납토성의 초축 동성벽이 4세기를 전후한 시점보다 빠른 시기에 완공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고고층서학적 자료가 현재로서는 없다고 볼 수 있다는 소리가 된다.

결론을 말하자면 풍납토성 동성벽 조사결과를 토대로 자연과학분석법의 중요성을 언급한 이 논문은, 단순히 출토유물에 의한 상대편년에만 근거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고고조사법을 통해 보다 종합적이고 정밀한 연대측정을 실시해야만 한다는 것을 거론하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 필자 개인적인 궁금점을 적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백제 도성의 위상(?)과 구획, 도성제에 대한 의문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제작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지는 '백제 기와'가 1단계의 구지표면에서 폐기된 상태로 확인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러한 기와를 얹은 건축물이 그 곳에 축조되어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에 동성벽이 초축되기 이전에 풍납토성은 과연 어떤 성격을 지녔던 곳일까? 이전부터 도성으로 사용되었다면, 어째서 기원후 3세기 무렵이 되어서야 성벽을 축조하였을까? 그 이전까지는 성벽이 없는 거대한 도시가 형성된 형상이었던 것일까? (해당 시기는 고이왕-책계왕대에 해당한다)

2. 풍납토성 동성벽의 증축 시점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

2단계(310~370)는 비류왕-계왕-근초고왕으로 이어지는, 소위 백제의 전성시기로 알려진 4세기 무렵에 해당한다. 한편 340~395년에 해당하는 3단계(1차 증축 시점)와도 중복된다고 본다면 근구수왕-침류왕-진사왕-아신왕에 이르기까지 이후 고구려 광개토태왕에 의해 열세로 몰리는 시점과도 맞물려진다. 백제의 풍납토성 증축은 백제의 성장에 따른 도성의 위상 확대 및 경기권 확대, 이후 고구려의 강력한 침공 위협에 따른 방어력 증강과 관련된 것인지 여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3. 장수태왕의 한성 공함 이후의 풍납토성의 운명

마지막 4단계는 풍납토성 동성벽이 최종적으로 완비된 상태로서 베이지안 통계학 결과, 375~460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실제 논자들은 3단계의 결합 역년대를 68% 신뢰 수준에서 350~370년(6.1%), 380~440년(56.2%), 490~510년(4.9%), 520~530년(1.0%)의 기간 중 '고고학적으로 풍납토성의 축조가 기원후 475년 이전에 완료되므로, 490년 이후로 확인된 재현성은 적용하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즉, 475년 장수태왕에 의해 한성이 공함된 이후 풍납토성에 대한 더 이상의 증축은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475년 이후 고구려군이 한강 유역을 직접지배했든, 간접지배했든지간에 풍납토성에 대한 추가적인 보수-활용 과정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있음을 반증하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내지화하여 직접지배했든, 완충지 혹은 변방으로 뒀든지간에 풍납토성과 인근의 인프라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475년에 장수태왕이 동원한 군대는 3만. 많다면 많지만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데에는 그리 많은 군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군은 한성을 함락해 그 수뇌부를 일망타진하고 개로왕을 목 벤 후 소수의 군대만 주둔시킨채 다시 북쪽으로 돌아간다. 그 이후 551년 백제-신라 연합군이 다시 한강 유역에 제대로 발을 대기까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어떤 식으로 관리했는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史書는 없다. 하지만 475~551년 사이에 한강 유역에서 백제의 군사력-정치력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친 것을 본다면 해당 지역이 완전히 空地化하여 불모지로 변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다른 성도 아니고 과거 도성이었던 곳)에도 여전히 상당수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을텐데 이들에 대한 통제나 관리는 어떻게 이뤄졌을까? 그리고 그들의 거주지는 어떤 식으로 유지되었을까? 단순히 기존 학계의 주장대로 고구려 혹은 백제의 지배가 온전히 이뤄지고 있었을까?

이상 3가지 정도다.

고고학에서도 점점 자연과학분석의 중요성은 증대되고 있으며, 그 분석 결과가 기존의 전통적(?)인 분석 방법과 대치되는 면도 있고, 부합되는 면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서로 대립하면서 어느 한쪽의 결과만을 고집 혹은 강요하는 쪽으로 흘러가서는 발전이 없을 것이고, 서로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금번 논문과 같이 단순히 시료를 채취해서 그 분석결과만 갖고 어떤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보다는 고고자료와 자연과학분석, 다양한 통계학적 접근법을 통해 다각도로 해당 연구대상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덧글. 그나저나 초기 백제사에 대한 글을 (1)만 써놓고 계속 못 썼네. 쩝...이건 언제쯤 다시 연재하려나. 휴우~한숨부터 나오네.


덧글

  • 초록불 2013/10/08 07:13 # 답글

    사료와 맞춰본다면 풍납토성은 도성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겠네요. 기존 결과와 상당히 다른 결론이 나왔으니 고고학계 안에서도 논란이 있을 것 같네요.
  • Warfare Archaeology 2013/10/08 20:13 #

    풍납토성이 도성이냐, 아니냐 논란은 당분간 계속 지지부진하게 이어질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아직은 풍납토성이 도성일 가능성이 높은 입장이긴 합니다. 뭐 대안이라 할 수 있는 완비된 도성체제가 다른 곳에서 확인되지 않는 이상은 어쩔 수 없겠죠.

    암튼...자연과학분석법, 특히 C14 분석이나 AMS 분석이 한때 무분별(?)하게 인용되어, 마치 이것이 새로운 대안인양 인용되고 적용된 적이 있지만, 그 폐해가 적지 않아 최근에는 다시 한발 물러나 이를 바라보는 분위기이긴 합니다. 그런 와중에 이 논문에서도 적고 있듯이 계속 이전과 다른 진일보한 자연과학분석법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추후 연구성과들을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인용할 필요성은 있을 듯 합니다.

    풍납토성의 연대문제...어떻게 끝이 날지 이거 원...저도 궁금합니다. 흠~
  • 구데리안 2013/10/08 08:44 # 답글

    정리하신 내용 잘 봤습니다.

    풍납토성이 백제 1기시대의 도성이 아니라 일종의 외성격일 가능성이 높다..라는건데. 장수왕의 함락 이후를 안다루셨다면, 추가로 말을 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만. 일단 고구려가 수도를 한성으로 천도를 안한 이상은 그렇게 큰 변화는 없다란 반증일텐데. 이걸 같이 두고 봐야하지, 따로 떼어두고 이야기 한다는건 좀...

  • Warfare Archaeology 2013/10/08 20:18 #

    일단 풍납토성 동성벽의 경우, 1단계 이전에는 그 자리에 기와 건물지가 있었다가 2단계에 초축이 시작되는데,그렇다면 1단계 구지표면에 있었던 기와 건물지는 과연 무엇이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도성과 관련된 건물인지, 아니면 그와 상관없는 것인지??

    외성격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것도 조금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풍납토성이 중층적인 구조를 가진 토성이 아닌지라, 고구려 장안성과 같은 복잡한 구조를 지녔을지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위의 논지만 본다면 풍납토성이 지금의 정교하고 거대한 토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3세기 무렵이며, 그 이전에 그 자리에 도성이 있을지언정, 우리가 생각하는 거대한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아니었을 가능성도 고려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 마한 수십개국이 있었다고 기록하는 중국 사서들을 봤을때, 한반도 서남부에 각 국가의 국읍이라고 할만한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유적이 수십개씩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너무 고구려의 도성과 같은 것만 찾으려고 하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제가 이해를 잘 못 했습니다. 어떤 것을 같이 두고 봐야한다는 말씀이신지...--;; 죄송합니다~
  • 역사관심 2013/10/09 07:35 # 답글

    재미있네요. 일단 저 새로운 기법이 얼마나 확실한 방법인지가 기본적으로 중요하겠지만, 말씀마따나 3-4세기의 풍납토성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당시 고구려와의 관계, 도성으로서의 모습등이 꽤나 흥미진진해지네요.
  • Warfare Archaeology 2013/10/09 23:13 #

    네~계속 새로운 자료들이 쏟아지고 있다는건, 그만큼 공부할 것도 많아져서 힘들다(?)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즐거운 일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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