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연히 인터넷에서 기사를 보다가 눈에 띄는 지도가 있길래 잠시 옮긴다.
구대열 이대 교수의 논문(클릭)에 대한 내용인데, 뭐 내용은 논문을 안 봐서 모르겠고 지도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하도록 하겠다(사실 내용에 있어서도, 장수태왕을 '한국사 최고의 외교 군주'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는 좀 성급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고구려는 장수태왕 시절 그 어떤 때보다 북위에게 잦은 조공사절을 보냈는데, 그럼 그 모든 것을 북위를 달래기 위해서 보내다고 봐야 하는가? ^^;;).
이제는 지도를 그릴때, 직접통치구역과 간접통치구역, 영향권 등으로 구분해서 그리는 것이 유행(?)이 된 것 같다. 노태돈 선생님이 고구려의 천하를 3차 천하로 규정한 이래, 단순히 고구려의 행정구역 이외의 영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뭐 전체적으로 이러한 학계의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도에 '실선'을 그어 오늘날의 국경선처럼 일종의 '영역'을 표시할 때는 주의를 요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 위 지도를 보고 몇가지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1. 직접통치와 간접통치의 정의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흔히 쓰이는 용어 중에 하나가 직접통치(지배)와 간접통치(지배)가 아닐까 싶다. 특히 고구려의 경우, 제국(帝國)이라고 보는 시각이 강하기 때문에 중앙과 변방, 정복과 피정복의 관계 속에서 고구려 내부의 사회구조를 살펴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영역확장 과정 속에서 피지배 정치체를 어떻게 정복-경영했는지 여부가 중요한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해 행정구역을 재편하고, 주민 이주와 더불어 조세수취 제도가 완비되면 직접통치가 이뤄졌다고 보고, 그렇지 않고 재지계 수장층의 권한을 어느 정도 남겨둬 반독립적인 상태로 관리하면 간접통치가 이뤄졌다고 보는 편이다.
그렇게 봤을때 고구려의 직접통치구역이라고 표현된 곳 중에서도 한강 이남이나 강원도 일원은 직접통치가 이뤄졌다고 보기 힘들다(물론 이를 두고 고구려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럼에도 이를 저렇게 표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더불어 간접통치가 이뤄졌다 하더라도, 재지계 수장층의 존재와 그 관리조직을 인정하고 재지계 사회를 재편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한 공납 수취만 이뤄진 경우와 재지계 수장층과 재지계 사회 일부를 재편하되 중앙에서 감시자격의 관리 일부 및 소수의 군대만 파견한 경우 등이 나뉘기도 한다. 장수태왕 시절 완벽하게 흡수하기 이전의 부여는 전자에 가까웠다면, 한반도 중부의 말갈 및 동옥저와 동예는 후자에 가까웠다. 더불어 신라의 경우에는 '신라토내당주'라고 하는 군지휘관의 존재와 수백명의 군대가 확인되고 있어, 후자 중에서도 군대가 파견되어 상주하는 경우와 군대가 파견되지 않는 경우로 나뉠 수 있다 하겠다. 한편, 한강 유역은 한성을 공함하고 고구려군이 주둔했지만, 백제와 고구려 어느쪽에 편입되지 않고 완충지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고, 끊임없이 국지전이 벌어지는 전장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간접통치구역이라고 적힌 거란의 영역 내에 '적봉진'의 존재도 확인되고 있는만큼 유목집단의 영역 내에도 고구려의 전략적 군사거점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높다.
즉, 간접통치라고 해도 이 한 단어로 설명될만큼 간단한 상황이 아니라는 소리다. 하물며 영역화가 이뤄졌다고 하는 고구려 內地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통치방식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간단하게 버무려 직접통치구역, 간접통치구역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지양할 필요성이 있다. 하물며 간접통치구역은 농목, 수렵(문화권), 영향권은 유목, 수렵(문화권) 식으로 양분하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2. 간접통치구역과 영향권의 차이
지두우는 유연과 더불어 고구려가 양분한 동몽고에 위치한 유목집단인데, 그런 직접적인 영토획득 과정을 거쳤음에도 이를 단순히 영향권으로 넣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 들었다. 지두우를 분할한 뒤 그곳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어떤 정치체의 영토를 다른 강대국과 함께 임의로 나눠 갖는다는 것은 이후 그 곳을 어떻게 관리했을지 짐작하기 쉬울 것이다. 단일 정치체를 강대국이 양분한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경우와 유사한데, 당시 지두우에는 유연과 고구려가 어떤 식으로든지 관리 혹은 군대를 파견해 서로간의 영역을 넘지 않는 선에서 관리했다고 봐야 적절할 것이다. 직접 양국이 분할했다는 것은 두 국가가 지두우를 서로 포기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무력 충돌을 할 수는 없기에 지두우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것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사후 관리도 철저하게 이뤄졌다고 봐야하는게 정상일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한강유역을 두고 신라에게 뒤통수 맞은 백제처럼 어느 한쪽에게 자국의 권리를 상실할테니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는 실위를 경영하는 방식(소수의 관리를 파견하거나 특산품을 통한 외교적 우위하의 외교 상거래 관계)보다도 강력한 통치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단순히 멀리 있는 정치체에게 조공이나 받고, 그들이 갖고 있지 않는 물건을 담보로 그들에게 반강제적인 충성심을 요구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두우 지역을 간접통치구역이 아닌 영향권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듯 싶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지도는 단순히 고구려 중심부를 기점으로 밖으로 퍼져 나가면서 점차 통치력이 약화되었을 것이다, 라는 상식적인 시각에서 그려낸 지도라는 생각이 든다.
3. 영향권의 범위
이 지도에서 보이는 영향권의 범위는 기존 지도와는 좀 다른 형태인 듯 싶다. 지두우를 의식해서인지 동몰골까지 서쪽 부분을 한껏 넓혔고, 실위와 물길을 의식해 북쪽으로 영역을 한껏 넓혔다. 하지만 실선으로 그린 경계선이 대체 어떤 근거로 그려진지에 대해서는 조금 재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고대의 경계는 山川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위의 영향권 역시 그런 식으로 접근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편, 영향권의 서쪽 경계를 보면 의도적으로 요서를 기준으로 선을 그은 것 같은데, 당시 요택을 비롯해 요서 지역이 전반적으로 북조(그 뒤를 이은 수-당)와 고구려의 완충지와 같은 공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굳이 선을 그렇게 그려낼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마치 서쪽은 북위의 영토이긴 한데, 지두우를 또 고구려가 분할했다고 하니깐, 영향권을 그리긴 그려야 하는데 고민하다가 그 가운데에서 대강 선을 그어 위로 올린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영향권의 북쪽과 동쪽 경계와 달리 서쪽 경계가 뭔가 조악해 보이는 것도 이때문이 아닐까 싶다.
대략 이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물론 논문을 직접 보지도 않았고, 1장의 지도 안에 저 많은 이야기들을 골고루 담기에는 어려움이 있는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시각을 갖고 있느냐, 안 갖고 있느냐의 차이는 크다고 생각한다. 그냥 간만에 기존 지도와는 다른 고구려 지도가 나왔길래 몇자 적어본다. 주절주절...^^









덧글
↑실위가 고구려에서 철을 취했다는 기록은 그냥 단순 교역 기록으로만 판단하는게 옳다고 봅니다. 거기서 외교적 상하관계를 도출할게 아니라.... 굳이 따지자면 그 기록을 두고 실위가 고구려에서 철을 약탈했다고 해석하기도 하거든요. (물론 제가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는건 아닙니다)
그나저나 실위가 고구려에서 철을 약탈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군요. 혹시 누구 견해인지 알려주시면 한번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를 주체로 보지, 실위를 주체로 보지 않는데 흥미롭습니다. ^^
글쎄요, 당시 실위와 북만주의 경제에 대한 사료가 소략해서 구체적인 규명은 어렵겠지만 목축과 수렵 위주의 실위가 농경 위주의 고구려에게 줄수있는게 무엇인지는 명확할것 같습니다. 실위의 대체재로 거란이나 말갈이 있지 않느냐고 할수있는데 당시 고구려가 거란이나 말갈에 확고한 영향력을 투사한것도 아니고 고구려 입장에서 이런 파트너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고구려에서 철을 약탈했다는건 위키에서 본건데요 위키를 출처로 제시하기는 다소 민망하나 학술회의 자리도 아니니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무튼 저도 저 해석을 처음 봤을때는 이상했지만 약탈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꼭 말이 안되는것도 아닌듯 합니다. 모바일이라 한자 원문을 찾기가 힘든데 해당 구절이 실위 열전이라는 점도 그렇고 고구려에게 공급받았다는 번역을 봐도 그렇고 고구려가 주가 되는 기록은 아닐듯합니다만 확실한건 원문을 봐야 알겠죠
이를 보면 시기에 따른 실위의 세력 변화는 인정되나, 기본적인 세력 범위에 큰 차이가 없다고 가정할 수 있고, ‘철’과 관련된 기록의 차이는 '원재료의 유무'보다는 ‘제철집단의 有無’와 관련성이 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철이 전혀 없던 나라가 수세기가 지난다 하여 갑자기 그 땅에서 철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일테니 말입니다.
한편, 철광석(혹은 사철)의 원재료를 채취하고, 이를 제련-제철하는 과정은 많은 자본과 시설,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는 국가의 기간산업으로서 고구려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이를 중요하게 취급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제철유적이 정확하게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규모 성곽과 관련해 제철유적이 확인되고 있는 양상을 본다면, 실위와 가까운 변경 지역에서 대규모 제철행위를 하지는 않았음은 알 수 있다. 그 말은즉슨, 고구려보다 국력이나 군사력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실위가 고구려를 약탈해서 철을 얻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더 희박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구려 내지까지 쳐들어와 철을 가지고 돌아갈 정도의 힘이 없었던 실위이기도 했으며,'取給'했다는『수서』와 달리『신당서』는 '率資'라고 적고 있어 분명히 실위가 고(구)려에게 철을 의지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과 1세기 정도만에 실위의 국력이 고구려에게서 철과 같은 중요한 국가자원을 약탈할 정도로 강력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후대의 기록을 통해 다소 모호한『수서』의 기록을 의역하는 것이 적절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신당서』에서 실위 땅에서 금과 철이 조금 난다고 했는데, 그것이 고(구)려에서 얻었기 때문에 조금 있는 것인지, 조금 있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나머지 부분을 충당한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11세기 무렵의 기록을 보면, 그 땅에서 동, 철, 금, 은이 많이 나고 그걸로 만든 기물도 정교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분명히 이전 시기와 확연히 다른 기록입니다. 이를 보면,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 내지에서도 실위 지역으로 기술자 집단이 이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술자 집단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놓고 본다면,『신당서』의 기록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해질 것이고요. 이는 곧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기술자 집단이 주변으로 이동하면서 실위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느냐, 없느냐가 될 것입니다.
이상의 기록들을 보면, 당시 고구려가 철을 매개로 실위를 부용화했을 가능성은 높다고 봅니다(김용만 선생님의 견해처럼 말이죠). 당시 고구려는 철을 매개로 말을 비롯해 목재, 기타 모피 등등 해당 지역민에게서 얻을 수 있는 재물들을 얻으면서 정치-경제적 복속을 요구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련 사료가 소략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추정은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당나라 지도1(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9/Tang_dynasty1.PNG)
당나라 지도2(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a/af/%E5%94%90%E6%9C%9D%E7%96%86%E5%9F%9F%EF%BC%88%E7%AE%80%EF%BC%89.png)
지도1은 뚜렷한 구분없이 전체가 당의 영역인양 표시하고 있고, 지도2는 노란색 부분만 당의 온전한 영역이고, 겉의 검누런 부분은 속국과 책봉관계에 있는 동맹국을 뭉뚱거려 놓은 거죠. 이런 부류의 지도는 정확한 역사정보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닌 국수주의, 제국주의적 관점의 표출일 뿐입니다.
중국 정사를 보면 실위는 단독으로 실리기도 하고, 奚 열전에 부언되기도 하는 등 시기에 따라 다릅니다. 이는 아마도 실위 諸부족(3개로도, 5개로도 얘기하며, 고구려와 연관있는 실위는 주로 南실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의 흥망성쇠에 따라 세력 판도가 변화했음을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저 지도에서 '선비(실위)'는 양자가 동일하다거나 혈연적으로 관련성이 있었다기 보다는, 고구려 북쪽에 선비 혹은 실위가 있었다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저 지도가 고구려 초부터 멸망기까지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적은 것 같은데, 부여-두막루, 물길-말갈도 같은 양식의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비-실위가 앞의 두가지 사례처럼 연관성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