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소개했던 논문과 달리 영류태왕에 대한 또 다른 논문이 있어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같은 고구려사를 전공하는 친구의 논문인데, 처음에는 학회에서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가, 나중에 정식 논문으로 나온 다음에 읽게 되었다. 제목은『高句麗 榮留王代의 정치 동향과 對唐 관계』이며, 주된 내용은 '영류태왕 재위기간에 있었던 모든 사건은 영류태왕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이는 곧 영류태왕의 집권력이 상당히 강했음을 의미한다'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전에 소개했던 정원주의 논문 또한 그런 측면에서는 기본적인 시각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전에 소개한 논문이 다소 진부한, 기존에 이미 많이 알려진 내용들을 통해 영류태왕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했다면, 이번에 소개한 논문에서는 약간 다른 시각으로 영류태왕을 살펴보고 있어 그 부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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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관 파괴와 천리장성
논자는 631년 경관 파괴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 이미 628년 당에서 수나라 전사자의 매장을 지시했고, 630년에도 같은 조칙이 발표되었는데, 특히 630년에는 돌궐과의 전쟁 이후 장성 이남의 수나라 전사자 수습방안이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631년 2월, 다시 한번 수나라 전사자의 매장을 지시한 뒤에 그해 8월 경관을 파괴했기 때문에 고구려 측에서 일련의 상황들을 모르고 있다가 당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논자의 주장인 셈이다. 특히 631년 2월부터 고구려에서 천리장성 축조가 시작된 것을 봐도 영류태왕은 당의 공격적인 자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경관 파괴에 대한 고구려측의 무대응과 천리장성 구축은 영류태왕이 對突厥戰의 결과(힐리가한이 사로잡히는)를 보고 내린 결정인 셈이다. 더불어 고구려 내부에서 대당정책의 강온 차이가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군사적 대비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세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논자의 생각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천리장성을 단순히 왕실의 귀족세력 억압의 결과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고구려 지도층 전체의 합의하에 축조하기 시작한 군사적 결과물로 봐야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실제, 수와의 전쟁 이후 어느 정도 전력이 복구되었다고 하지만, 요동 지역의 역량, 혹은 왕실에서 억압하고 싶어하는 귀족들의 역량만으로는 16년여에 걸친 대규모 축성공사를 실시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이는 태왕을 비롯한 왕실과 국가의 주도 및 지원이 있었다고 봐야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다만, 고구려의 집권층 내에서도 각 정치세력이 지닌 이해관계는 분명 달랐다는 것을 논자는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그 서로 다른 이해 관계의 최상위에는 최종 결정권자인 태왕이 존재했었고, 그에 따른 불만과 불평이 당장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러한 불만과 불평이 쌓이고 쌓여, 대당 외교상황과 맞물려 결국 반란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암튼, 경관 파괴를 두고 영류태왕의 당에 대한 저자세 외교의 결과로 낙인찍을 필요도, 천리장성을 단순히 영류태왕의 왕권 강화의 정치적 산물로만 볼 필요는 없을 듯 싶다는 것이 논자의 주장인데, 필자 역시 이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다.
2. 경관 파괴 이후 당과 고구려의 관계
이 논문의 핵심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논자는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佛祖統紀』라는 문헌을 갖고, 630~640년 사이의 고-당 양국의 상황을 재구성하였다. 기존에는 경관 파괴 이후 천리장성이 축조되면서 640년까지 양국간 교섭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영류태왕의 정치력이 약화되었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그런데 논자는『불조통기』「법운퉁새지」의 고구려와 당의 교섭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해당 원문은 다음과 같다.
八年 萊州奏 高麗三國僧與新羅百濟爲三國, 願入中國學佛法 欲覘虚實耳, 魏徴曰: “陛下, 所爲善足爲夷狄法, 所爲不善雖距夷狄, 何益於國, 詔許之.”
기록에 의하면 정관 8년(634), 고구려 등 三國의 승려들이 萊州에 이를 불법을 배우고자 허가 여부를 문의하니, 당 태종이 이를 수락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만 보면 크게 이상할 것이 없는데, 논자는 당시의 기록이『삼국사기』에 없음에 주목했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당과 꾸준히 교류하고 있었고, 특별히 634년에 위의 기록처럼 불법을 배우고자 당의 허가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삼국이면 삼국이지, 그 앞에 고구려를 특별히 병기하여 '高麗三國僧'이라고 기록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에 논자는 '고려삼국승'이라는 표현이 후대의 부회이며, 이는 고구려만의 단독 교섭 기사가 아닌가 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편, 당시 승려들의 요청은 虛實이 의심받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와 당 조정이 서로 외교적으로 예민한 상황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보고 있다. 이후 이 안건은 조정에서 논의되는데, 이를 두고 위징은 이적에게 불법을 배우게끔 하는 것이 '國益'에 이롭다 하여 허가해주기를 요청하고 당 태종 또한 그에 딱히 반대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논자는 고구려가 주변 국가와의 동향을 면밀히 파악한 뒤, 경관 파괴 이후 냉랭해진 양국 관계를 634년 무렵, 승려단을 파견함으로서 관개 개선하고자 노력했다고 해석하였다. 마침 634년 3차례에 걸쳐 당이 토욕혼과 전쟁을 치룬 것을 보면, 당 입장에서도 후방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은 분명 '국익'에 이로운 것이었고, 양국은 그렇게 승려단을 통해 교섭 재개에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시 승려들의 역할이 단순히 종교계에만 한정된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정식 사절단이 아닌 승려단을 파견함으로서 정치적으로 화해의 제스쳐를 취한 셈이다. 논자는 이를 두고 고구려가 630년 이후 끊임없이 외교활동을 통해 당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고 보고 있다. 그렇게 고구려 내에서는 천리장성 축조 및 신라 공격 등을 주도한 강경파와, 불교 교류 및 당과의 외교노선을 주도한 온건파가 상존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630~640년 사이의 고-당 관계는 냉랭했다고 알려진 것이 대부분이며, 앞서 소개한 정원주의 논문에는 고구려측에서 능동적으로 당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끊음으로서 고구려의 입장을 표명했다고 했는데, 논자는 이러한 기존 논의와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사료의 특성상, 편년체 사료처럼 해당 기사가 정확한지 어떤지의 문제는 남아 있지만, 분명 당시 고-당의 관계가 일관되게 냉랭하게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기만 해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후 당은 638년에 토번을, 640년에는 고창을 정벌하는데 특히 고창 정벌전은 대내외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할 정도로 당 입장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640년, 고구려는 태자 환권을 당으로 파견한다. 지금까지 고구려가 중원 왕조에 태자를 파견한 사례는 전연에게 멸망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후 稱臣하기 위한 것 뿐이다. 그만큼 고구려가 당시 당과의 외교관계에 얼마나 많은 공력을 들였음을 알려주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사건은 고구려 내에서 뜻이 다른 두 정치세력간의 충돌이 표면화되는 기폭제 역할을 하고 말았다.
3. 영류태왕과 귀족세력의 관계
고구려 내에 존재했던 강경파와 온건파는 대당정책에 있어 일정한 차이를 보였지만, 태자 파견 이전까지는 어느 정도 합의를 통해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하지만 영류태왕의 지속적인 대당 우호정책으로 갈등이 점점 고조되고, 결국 진대덕의 입국과 내부 정세 유출로 인해 갈등이 크게 증폭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고구려를 제외한 당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정벌된 상태에서 고구려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영류태왕은 먼저 여러 대인들과 연개소문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는 단순히 연개소문측 귀족세력의 힘이 워낙 강대해져 왕실의 권위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정변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왕실측에서 먼저 무력을 통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할 정도로 양자의 입장이 대등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논자는 주장한다. 즉, 영류태왕은 즉위 후 연개소문에게 시해당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면서 고구려 정국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양측이 무력 충돌을 벌이기 직전까지 이어졌는데, 이를 본다면 단순히 고구려 후기의 정치 상황을 왕실 대 귀족의 이분법적으로 보는 시각 혹은, 왕실의 힘이 약해지고 귀족연립정권이 도래했다는 식의 접근은 재고의 여지가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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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는 고구려가 시행한 일련의 조치들이 당의 대외정책, 혹은 국제외교관계에 따른 대응의 결과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논자는 그것들이 고구려 내 여러 정치그룹들이 각축을 벌이는 과정에서 합의된 결과물이라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더불어 기존 연구는 고구려 내정에서 영류태왕이 지닌 역할에 주목하지 못 하는 한계를 보였지만, 실상은 대당외교를 주도한 것은 영류태왕이고, 그 결과에 따라 영류태왕의 정치적 권위 또한 일정하게 상승했다고 논자는 주장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필자가 예전부터 견지해온 생각과 비슷한 부분이 많은 주장이었고, 앞서 소개한 논문과 다른 내용이 있기에 비교하면서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럼 다른 분들도 한번 참고하시길 바란다.
덧글 1. 새해 첫 글인데, 겸사겸사 인사를 드리자면...2015년 새해 모든 회원분들에게 좋은 일 가득하길 바라며, 역사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올해에도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과 사랑을 계속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꾸뻑~~)
덧글 2. 해당 학회 발표요지문(B)과 발표문(A)을 같이 올리니 논문이 너무 긴 분은 발표요지문만 참고하셔도 좋을 듯 싶다.
A.pdf B.pdf
- 2015/01/08 13:53
- yeohwi.egloos.com/1849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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