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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조선열전」관련 최고의 논문 상고사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김병준 선생님의「漢이 구성한 고조선 멸망 과정-『사기』조선열전의 재검토」라는 논문이다. 개인적으로도 고조선 관련해서 반드시 읽어봐야만 하는 텍스트로 생각하고 있고, 처음 이 논문을 읽었을때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관련 주제를 정리하셨지?'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오늘 심재훈 선생님의 페이스북을 보니 선생님도 주인장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셨고, 수업 자료로도 참고하신다고 하셔서 생각난 김에 블로그에도 소개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병준 선생님(이후 논자로 지칭)은 중국사 전문가로 고대 군현지배에 대해서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내오신 분이다. 하지만 정작 고조선 관련한 연구성과를 보면 이 분의 연구성과가 참고문헌으로 들어가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고조선> 혹은 <위만조선>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다 보니, 정작 漢의 입장에서 군현지배가 어떻게 진행됐는지까지는 살펴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암튼, 이 논문은 고고자료니, 지리고증이니 이런거 다 집어치우고 고조선 멸망과정에 대해 가장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사기』「조선열전」텍스트에만 집중해서 서술하고 있다. 논문의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논자는『사기』라는 사료의 성격에 대해 먼저 서술하고, 위만조선 멸망 직전 한나라가 멸망시켰던 주변 국가에 대한 설명을 해 이해도를 높힌다. 그리고 사료에 충실하게 전쟁의 도발-경과-고조선 내부의 붕괴 순으로 전쟁 국면을 설명하고 있다.

이 논문을 보면서 주인장이 주목했던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마천이『사기』에 관련 내용을 정리할때 기본적으로 한나라의 공식 서류를 참고했다는 점을 명시한 부분이다. 즉, 사서에 기록된 고조선 멸망 과정은 한나라가 작성한 공식 보고서에 기반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는 몇가지 의미를 내포하는데, 전쟁의 승전국인 한나라의 전쟁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전쟁 명분이 기록되었다는 점, 전공에 따라 포상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전쟁 경과 및 결과에 대해 꽤 정확한 사실을 기록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 논자는 위만조선 멸망 원인-경과-결과가 이미 한나라가 멸망시킨 남월, 동월, 굴복시킨 흉노의 사례와 유사함을 지적하며 이를 거시적인 안목(물론 승전국인 漢의 시각에서)에서 비교해 가면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즉, 한나라가 주변국을 정벌할 때 그냥 무턱대고 쳐들어간 것도 아니며, 심지어는 전쟁의 빌미를 제공해 놓고도 명분상으로는 적들이 도발해와서 어쩔 수 없이 이를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 는 식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위만조선 정벌을 이보다 이른 주변국들의 정벌에 뒤이은 것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는 논고는 많지만, 이들과 상세히 비교하여 한나라가 일관되게 주변국에 대해 전쟁을 수행해 왔음을 분명하게 밝힌 논고는 많지 않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3. 논자는 外臣에 대한 개념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 논문을 보면서 가장 주목했던 부분이기도 한데, 논자는 외신이라는 개념이 어떤 제도화된, 다시 말해 규정화되고 의무화된, 그래서 법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만, 상징적인, 그리고 관념적인 외신이라는 개념이 한나라 황제의 권력 강화와 맞물려 점점 구체화, 상세화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한 고조와 여후 시기, 문제와 경제 시기때까지는 이런 규제가 약했지만, 권력이 극강으로 비대해진 무제 시기가 되면서 외신에 대한 요구가 강화된 것이라는 지적인데, 이는 당시 한과 위만조선의 관계, 국제적 역학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4. 논자는 전쟁에 앞서 '반란'의 조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섭하가 위만조선의 비왕을 죽였기에 위만조선이 섭하를 살해했지만, 한나라 입장에서는 사건의 진위 따위는 관심없다는 것이다. 섭하가 무슨 짓을 했건 위만조선이 한나라의 신하로서 군대를 일으켜 황제에 거역했다는 점이 중요할 뿐이다. 이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기에 앞서 연개소문의 반란을 운운하면서 전쟁명분으로 삼은 것과 비슷하다. 그러면서 실제 일어난 반란과 반란을 모의한 것(모반)을 엄격히 분리해 기술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이 또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5. 논자는 누선장군 양복이 5만을 이끌고 나갔다는 대목에서 당초 죄수들을 모아 출발한 5만의 군대 중 대부분이 전장을 이탈해 결국 남은 7천여명만 이끌고 위만조선을 공격해야 했으며, 그마저도 전쟁에 패해 군대가 흩어졌다고 해석하였다. 일반적으로 이에 대해 5만의 군대 중 양복이 '우선' 7천명만 이끌고 전투를 벌인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고, 왜 5만 중 7천명만 이끌고 전투에 임했는지에 대한 사실은 크게 인지하지 못 해왔었다. 하지만 논자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지적했고, 이것이 죄수로 이뤄진 부대라면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밝혔다. 그와 더불어 남월을 공격할때의 상황과 비교하면서 위만조선 공격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어 한층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왜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한쪽은 공격을, 한쪽은 화평을 하자고 했는지, 남월 공격에 참전했던 양복의 상황과 비교하면 비로소 제대로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6.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고, 다시 한번 항복을 종용하는 사신이 왕험성에 당도하자 위만조선은 항복을 결심한다. 하지만 태자를 호위하는 부대의 무장을 해제하라고 하자 오히려 우거왕의 태자는 말머리를 돌려 돌아가 버린다. 이 부분에 대해 논자는 당시 군작제도의 규정에 대해 미리 설명하고, 한나라의 장군이나 병사들 입장에서는 항복한 사람보다는 포로를 획득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고 지적한다. 실제 한군이 항복한 자들을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았던 전례가 있음을 이유로 태자는 자신의 호위병력을 무장해제 시키려 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 부분도 단순히 생명의 위협을 태자가 느꼈구나~라고만 이해했는데, 이러한 전례를 위만조선측에서 알고 있었고, 본인들을 항복 사절이 아닌 포로로 취급하려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면 충분히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과의 교섭이 결렬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7. 논자는 조법종 교수님의 논고에서 언급한 부분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조법종 교수는 기원전 108년 우거왕이 살해되고 고조선의 지배층이 항복하면서 낙랑군이 설치되었으나, 대신 成己가 반란을 일으켜 이듬해(기원전 107년)까지 함락되지 않았으므로 고조선의 멸망은 기원전 108년이 아니라 107년이라는 주장을 했는데, 논자는 조법종 교수가 주목한 『사기』및『한서』「공신후표」의 기록들을 토대로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이 멸망했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 표를 보면 기원전 108년 6월, 우거왕 살해의 공을 세운 자들에 대한 봉후 기록과 달리 기원전 107년 3월에 성기의 반란을 진압한 자들에 대한 봉후 기록이 등장하고 있어 조법종 교수는 그 사이 9개월간 성기의 반란이 진압되지 않았다고 이해한 것인데, 논자는 공훈 내역을 가지고 심의를 거쳐 포상이 내려지는 단계까지 짧게 결정되는 것도 있지만, 길게 결정되는 사안도 있으므로 봉후 기록을 갖고 전공 시점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적고 있다. 더 나아가 논자는 해당 기록들을 취신하는 것은 좋지만, 반대로 성기의 반란이 종료된 후 '조선을 평정했고 4군을 설치했다'는『사기』의 기록이나 '원봉 3년(기원전 108년)에 4군을 설치했다'는『한서』의 기록을 취신하지 않을 때에는 그에 맞는 적절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사료 취신에 있어 어떤 자세를 갖춰야 하는지 잘 알려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상 7가지 부분 때문에 주인장은 이 논문이 당시 전쟁 상황을 아주 잘 설명한 최고의 논문으로 꼽곤 한다. 일단 남겨진 자료가 적은 상태에서 관련 사료 자체를 충실하게 살펴보고 나서, 고고자료나 기타 금석문 등을 살펴본다면 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고조선-위만조선에 대해 이해하는데 있어 이 논문이 중요한 기본 텍스트로 활용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Sagi-Chosun.pdf


덧글

  • 삼국사기 오주갑인상 2016/12/23 07:05 # 답글

    樓船
    將齊卒入海 - (1)
    固已多敗亡 - (2)
    其先
    與右渠戰 困辱亡卒 - (3)
    卒皆恐 將心慙 其圍右渠 常持和節 - (4)
    누선은 제(齊)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로 출병하였으나, 이미 여러번 싸움에 패하고 군사를 잃었으며, 앞서 우거와의 싸움에서 곤욕을 치른 패잔한 군사들이라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 하고 장군은 부끄럽게 여겨 우거를 포위하고도 항상 화평을 유지했다. - 국사편찬위원회
    누선장군이 제나라의 병사를 이끌고 바다로 들어갔으나 이미 많은 수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먼저 우거와 전투를 벌여 곤욕을 치루고 병졸을 잃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했고 장군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했다. - 김병준

    其의 앞뒤는 별개의 사건인데 두 사건에서 모두 군사를 많이 잃었다고 하므로 군사를 잃는 사건은 두 번에 걸쳐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2)는 (1) 바로 다음에 이어지므로 바다를 건널 때 군사를 많이 잃었다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其先은 이전에 일어난 사건을 이후에 일어난 사건에 이어서 설명할 때 쓰는 말이다. 따라서 其先의 앞에 있는 (2)은 其先의 뒤에 있는(3)이 일어난 이후의 상황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거와 교전한 이후의 상황이 병력을 많이 잃은 상태가 되므로 바다를 건널 때 병력을 잃었다는 뜻이 될 수 없다. 또 (1)은 (3) 이전의 사건이므로 당연히 (3) 이후의 사건인 (2)와 바로 연결될 수 없다.
  • Warfare Archaeology 2016/12/26 02:52 #

    앞에 나오는 敗亡에서 <敗>가 고조선과의 1차 전투를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 그리고 그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해석인 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김병준 선생님이 논고를 작성하는 전체적인 시각이 단순히 '한 vs 고조선'이 아니라 한이 고조선 이전에 치뤘던 모든 전역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맥락상 해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서 팩트는 누선장군이 우거와 전투를 벌이기 전에 <이미 병력 손실>이 있었다는 것일 겁니다. 그 병력 손실의 원인과 과정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아마 김병준 선생님도 저와 같은 색다른 해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말 그래도 한문 해석을 못 해서 저렇게 하지도, 기존의 해석을 모르는 상태에서 저와 같은 글을 썼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직접 여쭤보지는 않았지만요).

    '已'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시간적 대상이 고조선과의 전쟁에 한정된 것인지, 아니면 죄수를 이끌고 여러번 전투를 벌였던 기억에 대한 표현인지 여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이 당시 고조선의 '수군 전력'과 관련한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일단은 기존 해석 하나만 알고 있던 저한테는 또 다른 생각을 하게끔 한 부분이기에 포스팅에 소개했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 解明 2016/12/23 18:15 # 답글

    아니, 소개하는 것뿐만 아니라 원문까지 첨부하셨네요. 잘 읽겠습니다. ^-^
  • Warfare Archaeology 2016/12/24 00:17 #

    네, 같이 비교해 보시면 더 좋을듯 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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