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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양제 침공군 중 중장기병에 대한 해석 전쟁 · 군사

양제의 고구려 침략 당시 수나라 기병의 병종 특성


번동아제님의 블로그에 들렸다가 본 글이다.

저 해석대로라면 10만 혹은 그 이상가는 엄청난 규모의 중장기병이 수나라부터 고구려까지 진격했을텐데...

그에 대한 인적 · 물적 자원의 낭비도 여간 심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번동아제님도 막판에 '
그러고 보면 수나라의 양제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고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당시 수나라의 기병 병종 특성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봄직하다. 중장기병 자체가 장거리 원정에 적합한 병종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뿐더러 고구려 영토 곳곳에 자리한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이상적으로 활약할만한 병종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쓰신 것처럼, 중장기병을 대거 동원한 원정 자체가 이미 무리가 있었으니 과장 조금 섞으면 시작부터 수나라의 패배가 예견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중장기병의 경우, 여러 필의 말과 시종을 거느리고 행군시에는 具裝을 착용하지 않다가 전투시 착용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아마 서영교 쌤 논문에서 봤던 듯?), 어쨌든 그에 따른 전술적 경직성 혹은 기동성 저하 등의 문제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암튼 국내에는 기존에 이와 관련된 연구 성과가 없다는 것은 정말 문제가 있다.

정말 왜 아무도 이런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솔직히 필자 또한 이 부분에 대해서 그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이 사실이니 할말은 딱히 없다만.

하지만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는 이미 일찍부터 이와 관련된 연구가 있어왔다.

아래 소개하는 논문 및 거기에 참고문헌으로 달린 논문을 보면 이는 당시 보편적인 견해였던 것 같기도 하다.

번동아제님이 이미 알고 참고하셨는지, 아니면 모르고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잠시 소개하도록 하자.

中央廣播電視大學 歷史教研室 副教授로 재직하고 있는 '왕원조'라는 분이 1996년에 쓴 논문으로 다음과 같다.

王援朝, 1996,唐初甲騎具裝衰落與輕騎兵興起原因」『歷史硏究19964, 歷史硏究雜志社.

그 중 일부를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這說明隋軍的甲騎具裝8) 很難單獨抵擋突厥輕騎兵機動靈活的進攻, 需要與步兵配合作戰, 方能與之抗衡.

각주 8)隋書卷八禮儀志三, 大業 七年(611), 隋煬帝進攻高麗時, 隋軍的騎兵都是甲騎具裝, 每軍有騎兵四團, 其第一團, 皆青絲連明光甲, 鐵具裝, 第二團, 絳絲連朱犀甲, 獸文具裝, 第三團, 白絲連明光甲, 鐵具裝, 第四團, 烏絲連玄犀甲, 獸文具裝,考古1977年 第5安徽六安東三十鋪隋畫像磚墓亦載, 安徽六安東三十鋪隋畫像磚墓出土一甲騎具裝正與步兵戰鬪的畫像磚.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다.

수나라군 중장기병8)은 돌궐 경기병의 기민한 진공을 단독으로 막기는 어려웠고 보병과 함께 싸워야지만 비로소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

각주 8)
《隋書》卷八《禮儀志三》에 따르면, 大業 7(611), 수양제의 고구려 출정시, 隋軍의 기병은 다 甲騎具裝(중장기병)이었다. 해군은 기병을 4團 보유했는데, 그 제 1단은 모두 靑絲連明光甲, 鐵具裝, 2단은 絳絲連朱犀甲, 獸文具裝, 3단은 白絲連明光甲, 鐵具裝, 4단은 烏絲連玄犀甲, 獸文具裝이었다. 또한《考古》1977年 第5期《安徽六安東三十鋪隋畫像磚墓》: 安徽 六安 東 三十鋪 隋畫像磚墓에서 甲騎具裝과 보병의 전투가 묘사된 화상전이 1점 출토했다.

이상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왜 수 양제가 미련하게시리 고구려를 침공할때 그렇게 중장기병을 많이 동원했을까? 하는 부분이다.

정말 왜 그랬을까??? 그에 대해 어느 정도 답변을 줄 수 있는 논문으로 필자는 다음 논문을 꼽고 싶다.

韓昇, 1998,隋朝與高麗關系的演變」『海交史硏究1998年 第2, 中國海外交通史硏究會.

위에 언급한 논문보다 약간 뒤에 나온 녀석인데, 이 논문을 보고 필자가 쓴 글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논문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당시 수는 고구려 예하 세력은 말갈(속말말갈)과 거란 세력 일부를 이탈시키는데 성공했으며 돌궐을 복속시키고 서역과 서남 지역까지 복속시키는 등 국제적인 외교정책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양태왕의 요서 선제 공격은 이러한 국제적인 고구려의 외교적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몸부림(?)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실패에 그치고 말았으며 결국 수 양제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때에도 저자는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다. '승리자의 애도가'라고 표현하고 있는 장에서 필자는 수나라가 그처럼 외교적 · 정치적으로 우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했다고 적고 있다. 즉, 수 양제는 최대 징발 가능한 부병 60만을 훨씬 상회하는 규모의 대군을 모집하였는데 이는 전투력 약화를 가져오면서까지 수 양제가 무리하게 동원한 군대였다.

그럼 수 양제는 왜 이렇게 무리한 원정을 준비했을까? 그 이유 중 첫째는 주변 제국들(이미 수나라에 형식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항복했던)에 대한 과시용이었는데 서돌궐 처라가한이나 그의 아우인 권달설, 특근대내 등이 참전함은 물론 앞서 항복했던 말갈추장 도지계가 참전한 것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봤을때 고구려 정벌은 일거양득의 전략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둘째는 수 양제의 출병 목적이 고구려의 항복을 받는 것이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때문에 수 양제는 24군의 모든 군대마다 항복을 접수할 사자를 설치했는데 이들의 권한이 때로는 일선 지휘관들보다 높았기 때문에 전선에서의 지휘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다. 위무사자 유사룡이 우중문에게 을지문덕을 놓아주자고 했던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관련글 전문 :고-수 관계사에 대한 참신한 시각(http://cafe.daum.net/yeohwicenter/4ulL/148)

이 부분이다. 아마 수나라의 당시 원정에는 수 양제 개인적으로 과시하고 싶은 만용(?)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고구려를 얕잡아 보고, 그에 따라 아주 어리석을 정도로 중장기병에 집착해 대군을 동원한 건 아닐까 싶다.

암튼 그동안 중요하게 인지하지 못 했던 부분에 대해 다시 한번 공부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덧글

  • Warfare Archaeology 2010/10/06 14:40 # 답글

    음. 이글루스에 블로그를 만들길 잘 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첫날부터 좋은 공부를 하고, 또 좋은 생각을 하고 간다. ^^
  • 에드워디안 2010/10/08 15:53 # 답글

    미야자키 이치사다 본좌는 양제의 고구려원정 이유를 당시 무천진 군벌 내에서 평판이 좋지 못했던 수 황실에 대한 불만을 다른데로 돌리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더군요. 수 문제가 남조정벌 당시 논공행상을 인색하게 했던 것이 군부의 불만을 크게 누적시켰고, 때문에 양제 입장에서는 이같은 내부의 위협 요소를 제거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도 위신을 세울 목적으로 고구려원정을 강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0/10/08 16:00 #

    흠. 그런 연구도 있군요. 에드워디안님 혹시 미야자키 쌤의 어떤 논고인지 소개 좀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그나저나 그렇게 본다면 수 문제의 인색한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이 수 양제대까지 이어졌다는 얘기인데, 수년간 별 탈없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또 의외입니다. 아니면 그러한 불만을 안고, 수 문제 말기부터 꾸준히 고구려 원정을 준비했다고 봐야하는 건가요? 흐음. 갑자기 또 궁금증 폭발이네요. 쩝~
  • 에드워디안 2010/10/08 16:32 #

    68년에 초판된 '중국중세사(원제는 대당제국)'에서 그렇게 쓰여져 있더군요. 논공행상으로 인한 불만 뿐만 아니라, 본래 家格이 일류 명문가라 할 수 없는 수 황실에 대한 무천진 군벌장교들의 시기심이 상당했고 특히 개국 당시 문제가 자행한 前朝 북주 황실 일족들의 학살 사건은 무천진 군벌의 단결을 깨뜨리는 폭거로 받아들여져, 수 황실에 대한 평판이 더욱 나빠지게 한 요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개인적 생각으로 수 왕조가 저렇게 평판이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엔 나름 안정을 구가한 것은, '개황지치'로 대표되는 문제의 선정(과거를 처음 시행한 이가 수 문제죠)과 통일 후의 경기호황이 한 몫 했다고 봅니다. 그러다가 양제 치세에 들어가 대규모 토목사업과 잦은 외정으로 민심마저 수왕조를 이반하기 시작했고, 그렇지않아도 기회를 엿보던 무천진 군벌마저 들고 일어나자 수제국은 붕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죠.
  • Warfare Archaeology 2010/10/08 17:55 #

    흐음. 그렇군요. 그간 고-수 전쟁에 대해 무천진 군벌에 대해서는 비중있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중국중세사』라. 흐음~한번 찾아 봐야겠습니다. 좋은 책 추천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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